인조仁祖 1636 - 혼군의 전쟁, 병자호란
유근표 지음 / 북루덴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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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가 사망 후 그의 아들 이혼 李琿 이 조선의 국왕이 되었다.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광해군이다. 그러나 광해군에겐 자신의 이복 동생인 영창대군 및 따르는 소북 小北파와 광해를 따르는 대북 大北파 간 당파 무엇보다 명나라에게 공식적인 책봉을 받지 못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어서 겨우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왕위를 이어 갔지만 왕위는 불안했다. 그것을 불을 붙힌 것이 바로 명나라를 위해 파병을 하되 소극적으로 대처하라는 강홍립에 대한 명령과 무엇보다 이볻 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를 보낸 후에 가마 열기로 살해 측근인 유영경을 사약을 보내 사사 시키고 박웅서 및 의주 목사 서양갑의 칠사의 옥으로 인한 서인들의 반란 무엇보다 자신의 어머니 인목대비를 왕비서 폐하고 서궁에 감금하느 폐모실제로 서인들의 불만이 극에 달해 1623년 3월 12일 이괄의 군대가 반정군으로 창덕궁으로 향하는데 우리가 아는 인조반정의 시작으로 대북파인 류희분과 동생을 비롯한 40여명의 사람들이 처형 나뭐지 200명은 관직을 삭탈 후 유배형으로 광해군의 세력을 사라지고 인목대비는 다시 왕후로 복귀 아들인 광해군의 처형을 주장하지만 오성 한음으로 유명한 이덕형의 만류로 겨우 목숨을 보존해 강화도로 유배를 보낸다,

이괄은 인조반정의 선봉을 선 자로 자신의 큰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보았지만 공신목록 1등은 김류 이귀 김자점 심기원 신경전 최명길 이홍립 등 10명 2등은 김경진 신경인 15명 나뭐지 3등 28명 총 53명인데 이괄은 공신목록에 들어가지 못하고 자신을 평안도 영변으로 보내져 이로 인해 이괄은 불만이 커져 반란을 계획해  도성인 한양을 함락시키지만 관군이 재정비해 이괄을 궁지로 몰았고 반격을 가했지만 정예군의 이괄의 부대를 막아내긴엔 역부족이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가게 된다,

인조는 1625년 칙사가 도착 중국의 황제가 조선에 파견한 사신을 칙사 勅使라 불리는데 칙사들의 횡포 및 재물의 탐욕은 상상을 초월했다. 개성에 도착마자 개독례 즉 황제의 편지를 열어 읽어주는 의식을 명분으로 대놓고 뇌물을 요구 접빈사가 갖고 있던 은12000냥을 주지만 불만은 표시하자 도성에 오고나서 주겠다는 달래면서 인조실록에 나와 있는 명나라 황제 천계제의 책봉교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대 조선은 그대로 충근(忠勤)을 드러내어 매양 왕위를 계승할 초두(初頭)에 계속 봉해 줄 것을 청하니 이는 감히 마음대로 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보인 것이다. 생각하건대 우리 황조께서 일찍이 전 국왕 이혼(李琿)을 책봉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전번에 실덕(失德)하였기 때문에 버림을 받았다. 소경 왕비(昭敬王妃) 김씨가 나라의 사정을 갖추 아뢰고 그대 이종(李倧)을 세워 대통(大統)을 이어서 동쪽 지방을 진정했으면 하였기에 지금 특별히 그대를 봉하여 조선 국왕으로 삼는다. 명령이 천조에서 나와 위호(位號)를 바르게 정하였으니 그대의 작호(爵號)와 국토는 이제부터 소속된 데가 있다. 나라의 대소 신민들은 다함께 내가 신중하게 뽑아서 부여한 뜻을 몸받아 힘써 왕을 도와서 정치를 잘하고 수비를 철저히 하여 나라를 견고하게 해서 오랑캐를 막음으로써 나의 달벌(撻伐)하는 공렬을 빛내라. 나 한 사람이 그대 새 임금에게 사의를 둔 것이 아니다. 그런 때문에 이에 조서를 내려 모두가 알게 하노라."


이후 명나라 칙사는 인삼과 은자 뿐만 아닌 조선에서 구하기 힘든 해구심마저 요구 승정원일기엔 호랑이 표범 일본 수달 가죽  채화석 일본도 등 각종 검 등 국고의 전반에 이르는 물품들을 보냈다는 것만 봐도 명나라 말기 얼마나 부정부패가 심했고 횡포가 더했는지 보여주는 사례 보여준다.

만주에선 건주여진 누루하치가 여진부족들을 흡수해 여진족이 나라를 세웠던 금나라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나라 이름을 후금 後金으로 칭하고 사냥 및 생업에 종사하다 말을 타고 유사시 동원할 수 있는 청의 군사체계인 팔기군 8개의 색깔의 깃발아레 모인 부대들로 누르하치의 아들에게 패륵이란 지휘관으로 두면서 예병 즉 싸우지 않고 탈영하는 병사들을 살해하는 부대도 둔 군기가 엄격한 것이 특징이면서 부상병 전사자의 유가족에게 생계를 돕고 전리품을 분배에 우선권을 주는 등 병사들의 사기고 짐작시키는 것이 또한 특징인 후금은 아들 홍타이지가 淸으로 국호를 바꾸기까지 10년간 불렸다. 누르하치가 자신의 8가지 원한을 발표하면서 명나라에게 선전포고로 이후 중국대륙을 두고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바로 우리 조선이 이런 상황에 놓여 있게 된 것 명은 우리가 임진왜란 때 너희에게 천군 天軍 보내줘서 살려준 그 은혜를 갚으라며 당시 최전선인 사르후에 군대를 보낼 것을 요구 광해군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파병 지휘관 강홍립에게 싸우되 불리하면 항복하라는 명으로 사르후 전투에서 조선군은 13000명 중 포로 4000명 5~600명은 처형 나뭐지는 아사와 동사로 죽은 사람들이 많아 생존한 병력은 2700명 처참한 결말을 맞는다,


누르하치는 중원대륙을 차지하기 위해 특히 수도인 북경으로 가는 길목 만리장성 관문 산해관 외곽인 영원성에 지휘관 원숭환이 지키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원숭환에게 투항하면 살려주면서 동시 관직과 재물을 준다는 요구를 거부하면서 누르하치의 6만의 팔기군 원숭환의 2만의 명나라 군대가 붙은 영원성 전투가 벌어지는데 이때 포르투칼에서 수입한 화포 홍이포를 영원성을 요세로 만들고 조총병으로 기마병이 중심인 팔기군을 무력화 시키는데 이때 한번도 패배해 본적이 없는 누르하치는 큰 충격을 먹고 자기를 도운 몽골을 향해 칼을 빼들어 몽골을 정벌하고자 영원성의 패배로 약화된 팔기군으로 배후인 몽골을 굴복시키는 성공시키 성과인 동시 누르하치는 패전 쇼크로 병이 악화되어 68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아들 홍타이지가 후금의 2대 황제로 등극 이때 명나라는 요동 지휘관 모문룡이 평안도 가도에 거물면서 식량 및 피난처를 제공하자 이를 빌미로 또한 이괄이 후금으로 망명하면서1627년 정모년 침략 정묘호란의 시작이다,


정묘호란에서 놀라운 것은 의주부윤이 이순신 장군의 조카 이윤이 이곳에서 치열하게 싸워 전사한 점과 정봉수 및 의병들이 나선 정골산 전투에서 후금의 팔기군을 꺽은 것 이것이 병자호란의 예고편 청태종의 경고장으로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 척화파와 주화파 간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져 이때도 정신을 못차리고 강화를 맺는 것은 오랑케에게 굴복하는 것이라며 반대하지만 경제력 및 이때 인조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지휘관들 앞에서 향을 피우고 예를 올리는 의식으로 조선과 후금 간 조약 정묘약조를 채결 내용은 후금군은 즉시 철병할 것, 후금군은 철병 후 다시 압록강을 넘지 말 것, 양국은 형제국으로 정할 것,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을 것 철수 했지만 평안도 황해도 등 서북지역의 백성들을 터전을 잃고 성에 피신한 사람들을 살육당하고 여성들은 전리품으로 납치를 되는 큰 피해를 보았는데 이때 인조가 정신을 차리고 후금을 적대시 하지 않았다면 또 한번의 청의 침공 병자호란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영원성을 지킨 원숭한이 또 한번의 침공을 막아냈지만 홍타이지가 꾀를 써서 몽골군 주력을 중심으로 만리장성을 지나 희봉구 걸쳐 명나라 수도 북경을 공격하자 원숭환이 병력을 빼서 수도를 지키려 하자 광거문에서 자신의 병력을 갈아 겨우 후금을 물리치지만 홍타이지의 간계술수 환관을 포로로 잡다 매수해 거짓말로 원숭환이 길을 내줘서 북경이 위기에 빠졌다는 소문으로 원숭환을 벼른 명의 대신들이 탄핵을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에게 주청해 원숭환은 관직을 삭탈로 부족해 의심이 더해져 그를 책형 살점을 뜯어내 내장 터지거나 머리 골을 부수는 가장 잔인한 형벌로 죽였으니 이후 숭정제가 나무에서 목 매달아 자살 명나라의 멸망은 이전부터 관료들의 부정부패 뇌물을 요구 더욱 황제의 측근 환관의 힘이 넘 강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선양의 궁전에서 홍타이지는 나라이름을 후금에서 청으로 바꾸고 관온인성황제 란 존칭으로 연호는 덕을 숭상한다는 崇德 숭덕으로 바꾸어 황제 즉위로 청의 황제가 되었는데 문제는 몽골 한족들은 삼배고두례 절을 하지만 조선의 춘신사로 온 나덕헌과 이확은 오직 황제는 명나라 황제 숭정제만을 여겨 절 하는 것을 거부하자 청의 대신과 장군들은 이들을 의식이 끝나고 조선의 사신들을 두들겨 패면서 무례함에 격분하자 홍타이지는 조선과 맺은 맹약을 깨고 싶지 않다는 심정으로 겨우 분노를 참으며 진정했다 그러나 인조에게 보낸 청태종의 봉서 첨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이 이르기를 너희 나라는 천조(명나라)와 더불어 200년 우호를 닦았으니 하루아침에 단절할 필요는 없다


후금은 이후 명나라를 정벌할 병력과 배를 요구함과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는 것을 조선이 거절 이후 두 나라의 관계가 악화되어 1637년 병자호란이 발생하고 만다,
청의 진격속도 빠르고 한양에 다다르면서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을 가고자 했지만 이미 강화도는 청의 수중 들어서면서 다시 한번 남한산성에 들어가 각 도에 있는 감사와 근왕병들은 나를 구하하 교지를 내려 1000명의 병사로 청군과 맞서는데 우리 역사의 뼈 아픈 패전인 쌍령전투 전술에 대한 이해 부족 무능한 지휘관 청군의 먼저 빠른 기습공격 무엇보다 동원된 조선군이 조총에 쓸 화약이 떨어지고 평지에서 장애물은 겨우 목책을 의지해 싸우는 반면 청군은 전부터 단련된 활솜씨와 주력이 기마병이였기에 조선군 진영은 아수라장이 되고 더욱 화약을 받으러 간 조총병들이 화약이 폭발해 오히려 아군을 팀길하는 악재까지 겹쳤다.
 주화파와 척화파 간 갈등이 고조되고 더욱이 이 날의 날씨는 눈이 오면서 마이너스 가장 추웠고 피난민들까지 몰려오면서 부족한 식량사정은 더욱 악화 결국 안에 있던 말들을 잡아 말고기를 줘야 할 정도로 식량사정마저 좋지 않게 되면서 고립된 형국이 되고  청군이 귀순한 명군들에게 들여온 홍이포와 삼판선 82척을 동원해 강화도로 상륙작전을 위해 강화해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지휘관이 김경징은 지형적 특성 및 조그만 대비를 했다면 적어도 봉림대군과 조정 대신의 가족들이 포로로 잡히진 않았을텐데 습기가 차서 화포를 쏘지못해 청군의 상륙은 아무런 피해 없이 속절없이 이뤄져 봉림대군과 대신드이 포로로 잡히게 되면서  인조는  더 충격을 받아 항전 의지가 꺽이게 되어 인조는 홍타이지에게 조선 국왕 李倧 이종은 대청국황제께 글월 올려드립니다 란 제목으로 제가 약조를 어기고 제 잘못을 깨달았으니 절 살려주세요 란 편지를 올림과 동시 이후 1월 27일 청나라의 포로로 잡히지 않을까 란 걱정에 또 한번의 글을 올리자 홍타이지는 귀순만 하면 살려준다 난 거짓말 안한다. 답서와 함께 조유문 조선의 12개 항목 요구사항으로

그대가 만약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롭게 하여 은덕을 잊지 않고 자신을 맡기고 귀순하여 자손의 장구한 계책을 삼으려 한다면, 앞으로 명(明)나라가 준 고명(誥命)과 책인(冊印)을 헌납하고, 그들과의 수호(修好)를 끊고, 그들의 연호(年號)를 버리고, 일체의 공문서에 우리의 정삭(正朔)을 받들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는 장자(長子) 및 재일자(再一子)를 인질로 삼고, 제대신(諸大臣)은 아들이 있으면 아들을, 아들이 없으면 동생을 인질로 삼으라. 만일 그대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면 짐이 인질로 삼은 아들을 세워 왕위를 계승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짐이 만약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조칙을 내리고 사신을 보내어 그대 나라의 보병(步兵)·기병(騎兵)·수군을 조발하여, 혹 수만 명으로 하거나, 혹 기한과 모일 곳을 정하면 착오가 없도록 하라. 짐이 이번에 군사를 돌려 가도(椵島)를 공격해서 취하려 하니, 그대는 배 50척을 내고 수병(水兵)·창포(槍砲)·궁전(弓箭)을 모두 스스로 준비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대군이 돌아갈 때에도 호군(犒軍)하는 예(禮)를 응당 거행해야 할 것이다.
성절(聖節)·정조(正朝)·동지(冬至) 중궁 천추(中宮千秋)·태자 천추(太子千秋) 및 경조(慶吊) 등의 일이 있으면 모두 모름지기 예를 올리고 대신 및 내관(內官)에게 명하여 표문(表文)을 받들고 오게 하라. 바치는 표문과 전문(箋文)의 정식(程式), 짐이 조칙을 내리거나 간혹 일이 있어 사신을 보내 유시를 전달할 경우 그대와 사신이 상견례(相見禮)하는 것, 혹 그대의 배신(陪臣)이 알현(謁見)하는 것 및 영접하고 전송하며 사신을 대접하는 예 등을 명나라의 구례(舊例)와 다름이 없도록 하라.
군중(軍中)의 포로들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고 나서 만약 도망하여 되돌아 오면 체포하여 본주(本主)에게 보내도록 하고, 만약 속(贖)을 바치고 돌아오려고 할 경우 본주의 편의대로 들어 주도록 하라. 우리 군사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사로잡은 사람이니, 그대가 뒤에 차마 결박하여 보낼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내외의 제신(諸臣)과 혼인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하도록 하라. 신구(新舊)의 성벽은 수리하거나 신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대 나라에 있는 올량합(兀良哈) 사람들은 모두 쇄환(刷還)해야 마땅하다. 일본(日本)과의 무역은 그대가 옛날처럼 하도록 허락한다. 다만 그들의 사신을 인도하여 조회하러 오게 하라. 짐 또한 장차 사신을 저들에게 보낼 것이다. 그리고 동쪽의 올량합으로 저들에게 도피하여 살고 있는 자들과는 다시 무역하게 하지 말고 보는 대로 즉시 체포하여 보내라.
그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는데 짐이 다시 살아나게 하였으며, 거의 망해가는 그대의 종사(宗社)를 온전하게 하고, 이미 잃었던 그대의 처자를 완전하게 해주었다. 그대는 마땅히 국가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를 생각하라. 뒷날 자자손손토록 신의를 어기지 말도록 한다면 그대 나라가 영원히 안정될 것이다. 짐은 그대 나라가 되풀이해서 교활하게 속였기 때문에 이렇게 조칙으로 보이는 바이다. 숭덕(崇德) 2년 정월 28일.
세폐(歲幣)는 황금(黃金) 1백 냥(兩), 백은(白銀) 1천 냥, 수우각궁면(水牛角弓面) 2백 부(副), 표피(豹皮) 1백 장(張), 녹피(鹿皮) 1백 장(張), 다(茶) 1천 포(包), 수달피(水㺚皮) 4백 장, 청서피(靑黍皮) 3백 장, 호초(胡椒) 10두(斗), 호요도(好腰刀) 26파(把), 소목(蘇木) 2백 근(斤), 호대지(好大紙) 1천 권(卷), 순도(順刀) 10파, 호소지(好小紙) 1천 5백 권, 오조룡석(五爪龍席) 4령(領), 각종 화석(花席) 40령, 백저포(白苧布) 2백 필(匹), 각색 면주(綿紬) 2천 필, 각색 세마포(細麻布) 4백 필, 각색 세포(細布) 1만 필, 포(布) 1천 4백 필, 쌀 1만 포(包)를 정식(定式)으로 삼는다."
인조실록 15년 1월 28일



정문인 서문이 아닌 남문으로 나오며 곤룡포가 아닌 흰 세마포로 입고 나와 항복의식으로 함벽여츤 손을 등 뒤에 묶어서 입에 구슬을 물려 관짝을 등에 맨 상태로 가장 치욕적인 것과 삼배고두례 3번 절하고 9번 조아리는 의식 결국 그나마 덜 굴욕적인 삼배고두례를 삼전도에서 한강에서 절을 했다고 일화도 있고 이마가 피가 날 정도로 쌔게 했다는 일화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이후 삼학사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척화론자 등과 아들 소현세자를 볼모로 내주고 수많은 백성들 역시 포로로 붙잡혀 가게 되는데 이들을 피로인 여인을 당시 화냥년 당시 환향녀 還鄕女 다시 돌아온 여성을 오랑케와 정을 나누었다는 이유로 정결울 지키지 않아 자결을 명했고 다시 돌아온 피로인들에 대한 아무런 보상 및 대책을 내놓지 않게 된다. 산해관은 오삼계 장군이 지키고 있었지만 높은 세금과 징집에 이자성을 중심으로 한 농민군이 북경 점령 자금성이 함락되고 이자성의 군대가 오삼계의 딸을 납치하자 청에게 투항 산해관을 열어주면서 이후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자신의 딸들과 아들을 자결로 죽게 하고 자신도 결국 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결함으로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는 276년만 멸망하게 되고 청의 팔기군이 이자성의 부대를 격퇴하면서 북경을 점령 소현세자는 상국으로 모신 명나라의 멸망을 직접 지켜보게 되고  홍타이지가 사망 후 예친왕인 도르곤이 섭정을 하게 되어 청나라는 심양에서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면서 소현세자와 도르곤은 서로 가깝게 지내게 되었으며 당시 독일인 신부 아담 샬이 북경에 남아 있어 소현세자에게 카톨릭의 교리와 망원경 지구본을 보여주면서 최신의 서구의 문물을 보고 조선과 중원이 세상의 전부라 보던 소현세자는 큰 충격을 받게 되고  이 물건들을 선물로 받아  도르곤은 칙사를 보내면서 다시 조선으로 함께 피로인들도 소현세자가 지불한 돈으로 함께 귀국하게 되는데 인조는 자기 아들의 귀환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소현세자의 죽음엔 독살설 질병설 심지어 소현세자가 인조 앞에서 아담 샬이 보내준 망원경과 지구본 또한 카톨릭의 교리서 천주실의 및 각종 서적을 보여주면서 우리도 서구의 문물 받아들이고 청을 인정하고 카톨릭의 교리를 받아들이자 란 말에 인조가 열 받아 벼루를 집어 던져 벼루에 맞아 그 충격에 몸살로 숨졌다는 일화 소현세자는 귀국 후 건강이 나빠지기도 했고 세자를 치료한 의원들이 침을 놓고 치료하고 나서 사망 후 장례로 염을 하는데 세자의 모습이 검은 빚으로 약물에 취해 죽은 자와 같았다 란 기록과 치료한 어의가 세자 및 왕실 사람이 치료도중 사망을 하면 국문을 열어 처벌하는 것이 관례인데 인조는 의원들이 신중하지 않은 일이 별로 없으니 굳이 잡아다 국문 열 필요 없다 란 말로 추궁을 하지 않은 점으로 인조가 소현세자를 독살 타살시켰다는 의혹으로 아직까지 소현세자의 죽음은 사학계의 미스테리로 남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한 나라의 리더십이 중요한지를 알게 하는 대목이다. 저자는 국방을 대비하고 철저하게 하지 않고 청을 적대시 해서 병자호란이 발생했다고 본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는 맞고 하나는 잘못된 주장이다 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의 폐허와 더불어 최근의 후금이 쳐 들어 온 정묘호란의 피해까지 겹쳐서 청을 맞아 싸울만한 국력을 쌓을 애초에 여유조차 없다는 점이다. 더불어 후금이 무리한 공물 및 병력요구까지 겹치면서 그럴 상황을 못한다면 적어도 청을 적대시 하지 않는 방향으로 하지 않았다면 병자호란을 피할 수 있었다 홍타이지 즉위 때 대놓고 절을 하지 않거나 우리의 주군을 대명이다 라고 도발을 한 점 무엇보다 가도에 주둔한 모문룡의 군대를 철군시키지 않는 것으로 청의 분노를 일으킨 점 더욱 전쟁 중에도 백성의 안위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는 것 포로로 붙잡힌 백성을 위한 대책이 아닌 오히려 오랑케와 정을 나누었다고 정결로 자결을 요구하는 여성과 피로인들을 멸시하거나 추방 사람대접을 하지 않았다는 것 병자호란을 겪고도 오히려 우리가 중화의 중심이다 라는 소중화와 충북 괴산군에 명나라 황제 만력제와 숭정제를 모신 만동묘를 세워 멸망한 한 나라의 황제를 제조지인으로 모셔 자신들의 권력의 정당성으로 삼아 성리학만을 더욱 극단히 추구해 소현세자가 마지막으로 조선의 희망이였지만 그의 죽음 조선은 세계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거부 우물 안에 개구리로 만동묘가 흥선대원군 때 까지 존재했다는 점만 봐도 명나라에 대한 사대가 사대부들의 보물로 여긴 가치 성리학으로 인해 조선은 개혁 다운 개혁을 하지 못해 19세기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직면 지도자들이 중국에게 일본으로 주인을 바꾸어 나라를 팔아먹고 왕실을 보존하는 조선왕실의 후안무치의 모습을 보여줌으로 리더는 국민과 앞으로 미래를 위해 더욱 신중하고 외교란 한 나라에게 충성 바치는 종속적인 관계가 아닌 자국의 이익 안전을 위해서 다면적인 외교 실리적인 면을 차려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인조가 죽어나는 명나라만 받들고 새로 떠 오르는 청을 배척한 실수가 우리 대한민국에게 없기를 희망해본다,
#인조1644리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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