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사 걷기 - 한민족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따라
임경근 지음 / 두란노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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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치신 경력과 더불어 2019년 세계 교회사 걷기 출간하셨다. 이 책은 신라시대 고대부터 조선에 천주교 전래 이후 구한말 미국 및 선교사님들의 기독교 전파 그리고 복음이 전파되어 부흥했지만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김 동시에 교회 역시 박해와 수난을 겪고 광복 후 남 북한 교회 재건 교단 재건 분리 수 많은 교단 생겨나기 시작 각 주제들로 마지막으로 한국 기독교의 현 모습을 되돌아 보게 하는 주제들로 끝 마쳐진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신라 때 당나라로부터 경교가 들어온 것이 첫 전래이다. 하지만 먼저 카톨릭이 전해진 것이 기독교 전파의 첫 시작으로 보며 먼저 명나라에서 마태오리치가 예수회 선교사로 천주실의 카톨릭의 교리서를 전파하면서 이후 임진왜란 병자호란 겪고서 이승훈을 통해 처음 西學 서학이란 학문으로 전례되어 수 많은 양반 이벽 권일신 김범우 등 카톨릭을 믿게 되었다. 하지만 조상 제사를 거부하면서 조선왕실로부터 무군무부 조상도 임금도 모라보는 이상한 종교란 프레임이 씌어져 신해 신유 기해박해로 특히 이 시기는 첫 우리나라 신부 김대건 신부님이 등장하고 정조가 사망 세도정치로 외척들이 권력을 독점 백성들을 착취하던 조선왕조가 망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암울한 때 카톨릭에 대대적인 탄압과 순교가 극에 달하던 때이기도 하다. 마지막 박해는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러시아 견제하려던 것이 외척 기존 양반세력들의 비판을 돌리기 위해 병인년에 일어난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8명 카톨릭 신도 8000명 절두산에서 참수 당한 병인박해로 로즈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해병대가 강화도를 공격한 병인양요가 일어난다.


신미양요 미국과 교전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하면서 이후 일제가 윤요호사건을 계기로 강화도 조약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하고 나서 일본을 통해 제물포를 통해 미국 북 남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님들이 조선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먼저 의료인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님들이 오셔서 의료 교육선교를 시작


서상륜과 서경조란 양반을 통해 당시 권서인이란 직책을 통해 성경을 전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기 시작한 것은 명성황후를 구해준 공로로 일본으로 유학하던 이수정이란 분이 농업학자 쯔다센을 만남으로 조선인으로 첫 개신교인이 탄생 이후 한글로 신약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 신약 복음전서성경이 앞에서 언급한 선교사님들이 그 성경을 통해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 그리고 훗날 각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각 각 선경 찬송가 따로 쓰기도 하지만 하나로 묶어 성경전서가 탄생 그것이 우리가 대한성서공회가 탄생하게 된 시작이다.


청일전쟁 1894 과 러일전쟁 1904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 시작되고 그리고 고종황제의 잘못된 명령으로 기독교인들이 탄압을 받게 되면서 특히 서북지역 관남지역 즉 북한지역 주민들은 선교사들의 편의와 헌신에 가동해 복음을 빠르게 받아들이기 시작 각 교단 선교사님의 자립 자정 자치 네비우스 정책으로 더욱 가속화 되고 1907년 길선주 장로와 케나다 선교사인 하디 선교사의 자신의 죄를 고백함으로 시작 사경회 성경공부 모임이 활성화 되면서 이길선 길선주 장로를 통해 평양장대현교회를 중심으로 엄청난 자신의 죄를 고백 몸을 기우고 울며 나아가는 회개운동 평양대부흥이 시작되고 이 여파가 전국으로 흩어져 백만인 구령운동으로 이어져 한국 기독교의 교단 신학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본은 청나라 제정러시아와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고 미국 영국 등 서구열강들의 지지 묵인 속에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 박탈함으로 1907년 기유각서 사법권과 군대를 해산시키고 고종이 헤이그 밀사사건의 책임으로 퇴임 1910년 데라우치 이완용과의 밀약으로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됨으로 대한제국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란진다.


일제는 이후 포교규칙을 통해 종교를 공인과 비공인으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천도교 등 민족종교는 비공인으로 더 탄압 기독교는 서구열강과의 관계를 고려해 신토 불교 더불어 기독교를 공적으로 인정하긴 했지만 이승만 이승훈 안창호 수 많은 민족지도자 크리스천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함에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한다는 혐의를 씌워 105명 기독교인 이승훈 등 신민회 간부들이 체포되어 고난을 겪었고 그리고 고종황제의 사망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으로 민족대표 33명 16명 크리스천으로 대표는 이승훈 독립선언서를 낭독 파고다 공원에서 만세 운동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퍼져 대표적인 일제의 만행 경기도 제암리교회 방화사건 많은 조선민중들이 일제의 무단통치로 억압을 헌병이나 일본관리들을 죽이거나 관공서 방화 표출하자 총독부와 일본정부는 조선주둔군과 일본본토에서 병력을 보내 무력으로 진압했다.


일제는 1930년 세계대공황으로 자본주의 체제 국가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치게 되면서 일본도 이 여파를 피할 수 없어서 많은 기업들이 파산 실업자들이 늘어나 사회불만이 표출되자 군부를 중심으로 일본이 군국주의로 치닫게 되어 1931년 관동군이 만주를 침략하는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37년에 중국을 침략 중일전쟁 일으킴에 일제는 조선을 본격적으로 침략전쟁을 위한 병참기지역활을 위한 황국신민화 정책을 실시하는데 조선총독으로 부임 미나미지로가 임명함으로 조선의 모든 도시와 시골에 곳곳 신사를 세우고 국가의례 명복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 신사는 일본고유 무속신앙으로 일본건국 신화 태양신 아마테라스와 메이지천황을 모신 것이 신사의 신이다. 당시 선교사님들이 운영한 숭실학교 등 수많은 기독교 학교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기 시작 일제는 선교사님들을 간첩으로 몰아 추방하기 시작 감리교 성결교 장로교 수많은 교단들을 협박함으로 신사참배는 국민의례일 뿐 종교의식이 아니다 . 라는 성명서를 내고 신사참배를 찬성 더 나아가 목사님들이 일본본토 신사에 가서 참배하고 일본식 침례 (미소이바리이)를 받고 전투기 기관총을 헌납 교회의 종 금속들을 무기제조로 국방헌금 바치는 부끄러운 역사 모든 교단들을 헤체 일본기독교 산하의 일본기독교조선산하에 세워져 말만 기독교 단체 교단일 뿐 예배 형식은 아예 일본 신토로 한 기독교 정체성이 사라진 이상한 단체를 만들어 대표적으로 구약성경을 폐지 십자가 군병 같은 전투적인 요소라 한 찬송가들을 삭제 사도신경 주기도문 폐지 목사 대신 교사라 칭하고 일본대표 통리가 감독 조선대표 통리가 있는 모습 우리나라 기독교의 암울한 시기 그럼에도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이원영 박관준 장로 등 애국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시던 양심적 신앙분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반대운동 있어서 이로 인해 일제가 조선인을 징병 징집이 늦어지게 되어 1944년 말에 징병제를 실시하게 된다.


일제가 1945년 패망 미소가 각각 한반도에 들어오고 각 군정으로 통치하는데 북한은 극동군 산하의 소련민정이 실시되어 다스릴 사람으로 동북항일연군 지휘관 김일성이 북한을 다스리게 되는데 1946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세워져 당시 북한 지역에 있던 서북5도연합노회가 공산주의 정권 저지 운동 선거참여 거부로 김일성은 미신타파운동으로 종교들 중 기독교를 가장 탄압 핍박하기 시작해 많은 서북지역의 크리스천 분들이 월남하게 되고 북한은 기독교가 사라지게 된다 그 산하의 형식적인 기독교단체인 조선그리스도연맹이 세워지게 된다,


남한은 성결 감리 침례교 등 각 교단을 다시 세우고 신학교를 세우는 등 재건을 하고 성공을 햇지만 장로교는 신사참배 주도한 세력과 거부운동을 한 세력 간의 갈등과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 wcc 가입 노선을 두고 한국장로교는 수 많은 교단들이 쪼개져 세워지게 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1948.8.15 대한민국이 세워지고 초대대통령 이승만이 선출되어 기독교는 가빠르게 성장 성탄절을 공휴일 지정 극동방송 설립 등 다른 종교들보다 군대 내 군종도입도 더 먼저 도입된다.


크리스천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기독교 스스로 달라져야 한다. 고칠 것이 있으면 개선하고 회개 할 것이 있으면 숨김 없이 용서를 구하고 바로 잡을 것이 있으면 과감히 혁신해 나가야 한다. 우선 성직자와 지도층 인사들이 새로워져야 하며 다음에는 일반 신도들이 그 뒤를 따라야 한다.


나와 이웃 나와 사회의 차원으로 탈 바꿈하는 일이다. 모든 인간의 삶은 그리스도와 나 그리고 우리 사회라는 한 차원 높은 삶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그런 사명을 위해 크리스천은 모범적인 사회인이 되며 기독교는 인류와 역사의 새로운 희망과 변화를 주어야 한다. 100년 후에는 모든 크리스천들이 존경과 흠모의 대상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겠는가

김형석 교수님의 기독교 아직 희망이 있는가 내용 中

항국 개신교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사는 데 약하다. 한국 개신교의 성장이 멈춘 이유는 전도와 사명이 약호되었기 대문이 아니다. 오히여 말씀에 순종하는 삶 삶에서 드러내는 살아있는 신앙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고 그들이 믿는 소망이 무엇인지를 묻고자 찾아오는 전도와 선교 없는 것이 문제다.


선배이신 김형석 교수님과 수 많은 어른들이 내리신 한국 기독교의 모습 진단이다. 한국 기독교는 산업화와 높은 교육열 조용기 목사님 등 수많은 부흥 운동으로 많은 성장을 이루어 미국 다음으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 기독교 국가라 할 정도로 많은 성장을 1960~80년대 이루었다. 하지만 90년대 이르러 그 성장이 멈추고 후퇴하기 시작 이후 기독교인의 수가 감소하기 시작했는데 많은 원인들이 있지만 이 책에서 다룬 잘못된 종말론으로 사람들을 현혹한 다미선교회 사건이나 교회의 잘못된 모습으로 사람들이 실망하기 시작했고 (샘물교회 사건) 특히 기독교가 노골적으로 정치의 개입함으로 보수화 되기 시작한 점으로 특히 코로나 바이러스가 펜데믹으로 유행 감염지가 교회로 지목되고 일부 보수 교회를 중심으로 태극기 집회 반정부 집회 등 감염확산의 주범이 되고 무엇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이분법적으로 살아 진중권 교수가 말한 것 처럼 세상과 소통 나아가는 법을 배우지 못해 우리들만의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어서 세상의 조롱 개독교란 부끄러운 모습이 되어 타종교들보다 신뢰도가 떨어져 부흥은 커녕 세상이 교회를 오히려 걱정하는 모습이 되고 말았다.

인문학적 무지 폐쇄성 우리가 빛과 소금으로 살지 못하는 모습으로 얼마나 우리 기독교가 유지 될 수가 있을까..? 이제는 4차산업혁명이 점점 도래하기 시작 인공지능 빅테이터가 우리들의 삶 속으로 다가오는 속도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점점 더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이런 시점에 김형석 교수님의 말씀처럼 이런 식이면 미국이나 유럽 서구처럼 우리도 교회가 문 맏고 술집 박물관으로 바뀌어 교회가 살아있는 존재가 아닌 역사 속의 박물관이 되는건 시간문제라고 봐야 한다. 150년 전 이 땅에 선교사님들이 목숨을 내 걸고 이 땅에 귀한보물 복음을 선물로 주어 수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 나라를 이끌고 성장의 주역이 되어 사회역활을 다함과 동시 부끄러운 모습을 되돌아 보았다. 임진왜란이 발생 후 유성룡은 내가 지난 잘못을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予其後患 시경의 구절을 본 따 후대가 이런 잘못을 다시 저지르지 않길 바라는 뜻에서 징비록이라는 대작을 남김으로 본보기가 되게 한 것처럼 역사는 과거를 되돌아봄으로 미래를 대비하는 미래지향적인 학문이다. 이 질문을 마침으로 서평을 마치고자 한다 과연 우리는 다가올 미래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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