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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평점 :
안녕하세요. 이번에도 역시 새로운 이벤트와 함께 다시 돌아왔습니다. 대략 한 10여년전 외대에 진학하던 시절의 저는 어느정도 점수에 맞춘 감이 없진 않지만 그럼에도 나름 부푼 꿈을 안고 스페인어과라는 곳에서 낯선 언어와 처음 마주하게 되었었죠. 처음엔 뭐든게 다 괜찮았습니다. 하나둘 모르던 단어와 문법을 알아가는 과정도 정말 신선했고 언젠가 그 조합된 문장들을 사용해 펼칠 미래의 가능성들 역시 정말로 무한해보였죠. 하지만 곧이어 그 순탄하던 길에도 저를 가로막는 벽이 하나둘 솟아나기 시작합니다. 아니 그냥 물건인데 왜 남성형 관사를 쓰는게 있고, 여성형 관사를 쓰는게 따로 있는거야? 동사가 왜 상황마다 이렇게 제멋대로 변하는게 많아? 영어가 선녀였네 등등. 그럼에도 어떻게든 그 장애물들을 넘어보려 부단히 애쓰고 또 애써봤지만 그런 저의 애처로운 몸부림을 단 한순간에 저 밑바닥으로 추락시킨 끝판왕급 장애물이 마침내 등장하고 말았으니 그것은 바로 마의 RR 발음. 뭐 연습하면 누구나 다 따라할수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해도 안디는 사람에게 그런 듣기 좋은 말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결국 그 끝판왕의 벽을 넘지 못한 저는 고심끝에 스페인어과를 나와 나름 우리말과 비슷한 일본어과로 전과 신청을 하기로 결정했고 그렇게 짧고 강렬했던 스페인어와의 인연을 마무리하게 되죠. 다행히 일본어만큼은 좌절할 정도로 큰 벽이 가로막는 일이 없어 이렇게 무사히 졸업하여 사회 생활을 하고 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단순히 일본어가 우리말과 비슷해 무난히 졸업할수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많은 사람들이 콘텐츠의 영향으로 익숙해진 오직 그 감각만을 믿고 일본어에 자신있게 도전들 하지만 십중팔구는 그 평소에 쓸일 없던 한자라는 벽에 막혀 추풍낙엽처럼 무너져내리고 말았을 겁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그 한자마다 음독이냐 훈독이냐를 일일히 따져봐야 하고 또 그 음독에도 공식 발음이 무려 3가지 버전이 존재해서 지금도 일본인들은 상대방에게서 명함같은걸 받는 일이 있다면 반드시 상대방에게 어떻게 발음하는지 물어보는게 예의라고들 하지요. 그럼 그 난해한 불규칙들의 터널을 어떻게 통과해야 하는가? 그것에 대한 답은 어느 언어나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감히 확신합니다. 그것은 바로 무조건 외우는 것. 그리고 그 외우는 과정을 이끄는 연료는 그 언어가 쌓여져있는 사회, 콘텐츠,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애정이라고. 이번에 소개할 작품에는 그 제목처럼 언어 희랍어(그리스어)가 주요 소재로서 등장합니다. 사용하는 인구도 지역도 한정적인 낯선 언어, 게다가 지금은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이없는 고대 버전의 언어라니. 그만큼 접근성도 훨씬 떨어지고 중간태라는 까다로운 문법적 장애물도 존재하는 등 여러모로 만만치않은 언어일수 있겠지만 그런 언어라 할지라도 나름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분명히 존재할테고 또 단순한 관심의 차원을 넘어 자신의 인생을 지탱하는 든든한 버팀목으로서 언어를 마주하려할지도 모릅니다. 말을 잃은 여자와 두 눈이 멀어가는 남자. 서로 접점도 없던 두 사람이 마주해 할 이야기라곤 오직 불운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단지 그것뿐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으나 그들은 부조리하게 자신들을 덮쳐온 각종 재난에도 불구하고 희랍어라는 낯선 언어를 공부하는 시간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그 소중한 언어의 틀을 통해 자신들이 이 땅위에 발딛고 살아가야할 나름 합당한 이유를 제대로 발견해내게 되죠. 앞서 언급했듯이 희랍어에는 중간태라는 개념이 존재합니다. 능동도 그렇다고 수동도 아닌 애매모호한 문법. 하지만 그들은 이 애매모호함 속에서도 자신들의 짓눌린 인생을 그럼에도 살아내야할 나름의 정당한 명분을 분명히 목도하게 되죠. 그렇습니다. 우리는 확실한 정답지없는 이 인생이란 여정을 그저 하나하나 전부 외워나갈수밖에 없는 겁니다. 마치 제가 그 모든 한자의 벽과 불친절한 발음들의 난립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한 언어를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마스터했듯이 인생 역시 이와 마찬가지라는 거죠. 그렇게 따져보면 제가 지레 겁을 먹고 스페인어와의 인연을 과감히 정리해버린 것도 어찌보면 너무 빠른 포기가 아니였나 뒤늦게 살짝 아쉬운 감정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비록 우리가 타고난 초인이나 선택받은 금수저는 결코 아니라 할지라도, 설사 남들보다도 더 험난한 장애물이 그 앞에 놓여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때마다 상황을 봐가며 다르게 써야만하는 그 불규칙한 문법들처럼 우리에겐 조금은 다른 접근 방식이 그때마다 필요할뿐 결국엔 그 모든 불규칙들이 쌓이고 또 쌓여 마침내 인생의 마스터라는 그 궁극의 경지에 한발짝 더 가까이 다가설수도 있을테죠! 여러분들도 저처럼 미리 손쉽게 포기하시지 마시고 내 앞을 가로막는 그 수많은 돌발변수들을 그저 귀찮고 성가신 것으로 여겨 치워버리는 것이 아닌 끊임없이 애정을 주입해 마침내 진정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나가야할 하나의 도전과제로서 침착하게 마주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