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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가라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평점 :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다시 이렇게 이벤트의 힘을 빌어 돌아왔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흉노라는 국가세력에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천하통일의 영웅 한나라 유방의 군대를 궁지에 몰아넣고 무려 그들에게서 조공을 받기도했던 역사상 최초의 유목제국. 한때 조금이라도 있어보이고픈 티를 내고 싶었던 어린시절의 저는 그 흉노의 서사에 반해 사와다 이사오의 흉노란 책을 구입해 항상 옆자리에 끼고 다니곤 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불에 무한 킥을 날릴 부끄러운 흑역사에 불과하고 그 내용도 거의 기억나지 않을지 몰라도 어느 한 대목만큼은 지금도 여전히 강렬한 인상 속에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쳐 지나갈지도 모르는 작가의 후기. 작가분이 몸이 아파 병원에 누워있을때 그곳에서 한 환상을 목도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서흉노의 선우 질지가 무리들과 함께 한나라 병사들에게 쫓기는 이미지였죠. 눈보라가 몰아치는 극심한 추위 속에서 대부분의 부족민들은 굶거나 지쳐 얼어죽고 말았고 이제 남은 것은 주변의 소수의 전사들뿐. 비열하게도 한나라에 머리를 조아린 동흉노의 선우 동생 호한야와는 달리 자신은 흉노의 긍지를 품안에 안고 끝까지 싸우다 죽으리라. 그 뼈에 사무친 질지의 고함소리를 마지막으로 작가의 환상은 그대로 종료되고 말지만 실제 역사속 질지와 서흉노 무리가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우리는 결코 아는 바가 없습니다. 사실 흉노에대한 기억뿐아니라 수많은 역사속 페이지들이 이런 식으로 대부분 찢겨진채 남아버려 이제 영원히 그 진상을 알수없게된 경우가 꽤 있죠. 그리고 그것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속 수많은 개개인들에대한 평가와 애도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바람이 분다, 가라 속 정희는 어느날 어린시절부터 친했던 절친이자 화가 인주의 부고 소식을 전해듣게 됩니다. 폭설이 한창 내리던 미시령에서의 불운한 교통사고. 하지만 한 칼럼을 계기로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인주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미모의 여화가로 절찬리에 소비되고 있었고 이에 분노한 정희는 인주가 자살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기위해 그녀의 지나온 삶을 거슬러 그녀가 자신의 삶을 사랑했다는 기록들을 하나하나 파묘하기 시작하죠. 하지만 인주의 삶을 파면 팔수록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그녀의 삶에대해 무지하고 무신경했는지 더더욱 절감하게될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과 살아가며 나는 그 사람 잘 안다고 감히 자부하곤 하지만 과연 정말로 타인이 그 사람의 정확한 실체와 진상을 모두 안다고 단정할수 있을까요? 마치 역사속 잊혀진 서흉노의 무리들처럼 새로 발견되는 증거가 없는한 그 인물에대한 페이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훼손되고 복구할수 없는 먼길을 가는 법이죠. 하지만 그렇다하여 우리가 그 인물을 추억하고 기억하는 것을 포기해도 될까요? 이 땅위의 모든 신화와 영웅서사시가 저 창백한 푸른 점에서 이루어진 하찮은 것일지라도 그들에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기억하고 복구하려는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는 그 머나먼 과거의 일임에도 알렉산드로스의 위대한 모험에 흥분하고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에대해 내 일처럼 공감하고 눈시울을 붉히곤 했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제아무리 증거가 부족하고 희박하다 할지라도 흉노의 상처받은 자존심 질지의 고함을 현대에 소환했듯이 그 어떤 고난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검은 먹그림 속에 잠겨있던 진정한 인주의 삶의 증거를 제대로 끄집어 낼테죠. 그것이 사랑하는 이를 추억하는 남은 자의 특권이자 고집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