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디랙 - 양자물리학의 천재 폴 디랙의 삶과 과학
그레이엄 파멜로 지음, 노태복 옮김 / 승산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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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물의 생애를 이렇게 자세히 쫓아가고자 했던 저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감사에 글에 나타난 수많은 인물들과 기관들을 보면 저자는 정말 폴 디랙의 모든 것을 알고자 했던 것 같다. 각주와 참고문헌을 보더라도 쉬이 쓰인 책은 아닌 것이 분명하고, 덕분에 잘 만든 다큐멘터리를 보듯이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양자역학을 잘 알지 못하는 덕분에 디랙이 아니었다면 양자역학 분야의 발전이 얼마나 더뎌졌을지 가늠할 수 없다. 그러나 제1차대전과 제2차대전 사이 전 유럽(공산화된 소련을 포함하여)의 똑똑한 젊은이들이 서로 협조하거나 경쟁하면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나가는 장면은 과학사에서 다시 일어나기 힘든 일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최근 노벨 수상자들의 연령과 디랙과 그의 동료들이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을 때의 나이를 비교해 보라!

2차대전 말에 개발 성공한 핵무기는 흔히 말하는 인종과 국적에 관계없이 연구 결과를 과학자들끼리 공유하는 낭만적인 시기를 완전히 종식시키는 상징적 사건으로 보인다. 아인슈타인뿐 아니라 디랙과 하이젤베르크도 머나먼 일본까지 가서 열렬한 환대를 받으며 강연을 했고(강연의 내용은 재빨리 일본어로 번역되었다.), 당시 청중 중에 있던 영특한 일본인이 양자역학 분야에 대한 공로로 나중에 노벨상도 받게 되지만 그 일본에 원자폭탄이 두 차례나 투하되었으니 말이다.

본문은 1장부터 31장까지 구성되어 있는데 29장에서 디랙과 그의 아내 맨시도 죽는 것으로 끝난다. 마지막 30, 31장은 저자 파멜로의 의견이다.

1장을 제외하면 책의 전반부는 디랙의 학문적 전성기를 주로 다루고 있는데 채 1년이 되지 않는 기간을 하나의 장에 묶어 놓기도 했다. 가장 짧은 기간을 하나로 묶은 부분은 18장으로 디랙이 슈뢰딩거와 함께 노벨상을 받은 193312월 동안만을 다루고 있다.

후반부로 갈수록, 한 장에서 다루고 있는 기간이 점점 늘어나 10여 년의 기간을 넘기도 하는데 인생의 후반부는 느리고 별 변화가 없는 것은 누구든 마찬가지인가 보다.

 

디랙은 약간 자폐증이 의심되고, 오랜 결혼 생활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얼마 앞두고는 불행한 결혼이었다고 주변에 얘기했다고 한다. 저자가 자폐증 전문가의 말을 빌어 자폐증을 지닌 남자가 그나마 외국인 아내와는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영화 네이든과도 들어맞는다. 결혼 생활에서 힘든 점도 많았겠지만, 디랙은 맨시(유진 위그너의 여동생, 유대계 헝가리인)와 결혼하지 않고 혼자였다면 아마 훨씬 더 힘든 삶을 살았을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라는 배경에 힘입었겠지만, 과묵하고 혼자 있길 좋아했다는 디랙은 놀랍게도 여행을 자주 다녔다. 2차대전 중에도 임신한 아내를 두고 휴가 여행을 간 것은 못마땅하지만, 당시 유럽의 지성인들이 가능한 한 자주 여행을 떠나서 각지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는 문화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특히 그의 절친 카피차가 있는 소련으로 가능하면 자주 가려고 했고, 인도와 일본은 물론 미국은 여러 번 방문하였으며, 말년에는 당시의 많은 유럽 지성인들처럼 미국에 정착하게 된다.

그가 젊은 시절에는 좌파 진영을 옹호하고 초창기 스탈린 정권에도 기대 찬 우호를 가졌다는 점은 흥미롭다. 당시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학생과 교직원들 중에서 공산주의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 인물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는 결국 스탈린이 다 깎아 먹었지만,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보면서 이해가 되지 않던 부분이나 미국에서 매카시즘이 왜 그렇게 쉽게 먹혀들었는지 조금 설명해 준다.

소련에서 주로 활약한 카피차나 란다우 같은 과학자의 삶이 전기로 나온다면 그 또한 아주 재미있을 것이다.

놀라운 사실 중의 또 하나는 1948년이 되어서야 케임브리지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첫 여성 입학생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1952년에 왕위에 올랐다. 1948년에는 여왕이 아니라 공주 신분이었을 것이다.) 이런 점을 보면 신생 대한민국이 꽤 진보적이었다.

 

디랙뿐 아니라 동시대 여러 물리학자들의 소소한 얘기가 많이 나오고, 2차세계대전을 전후해서 영국인들의 생활 모습도 많이 알 수 있는,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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