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것들의 밤
정보라 지음 / 현대문학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인간의 기준이 뭐죠?”


- 「밤이 오면 우리는」 중에서


🔖

나는 수소 원자가 사람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온도가 올라가면 충돌한다. 밀도가 높아져도 충돌한다. 같은 장소에 오래 갇혀 있으면 반드시 충돌한다.

어쩌면 인간은 점점 달아오르는 이 행성에 너무 많이, 너무 오래 갇혀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 「밤이 오면 우리는」 중에서


🔖

나는 조금 웃었다. '숨을 죽이고. '안도의 한숨'. 이것은 모두 우리가 아직 인간이었을 때 자기도 모르게 하던 행동들이 아직까지 무의미한 습관이 되어 남은 것이다. 윌버도 나도 ‘살아 있지 않다'. 숨을 쉬지 않아도 우리는 '죽지' 않는다. 그러나 밖에서 수상한 기척이 들리면 윌버도 나도 동작을 멈추면서 동시에 숨을 참는다. 습관이란 끈질긴 것이다.


 - 「우리는 악마에게서 왔다」 중에서


✏️


정식 출간 전, 프리뷰 서평단으로 만나 본 정보라 작가의 연작소설 『이름 없는 것들의 밤』은 거대한 세계관을 품고 있는 SF소설이다. 전쟁과 기계, 지배와 저항, 그리고 인간과 비인간에 대한 묵직하고 다채로운 질문들을 가득 담고 있다. 


*

1. 「밤이 오면 우리는」 


친환경적인 에너지 원료를 찾기 위한 대규모 인공태양 건설 계획이 세계 각국에서 발표되었다. 하지만 여러 개의 태양은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결국 파멸로 이끄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었다. 이에 로봇들은 “지구상 다른 모든 생물종을 위한 최선의 안전장치는 인류 문명의 종말”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인류를 말살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결국 인간이었다. 로봇의 편에 선 자들은 같은 인간을 밀고했고, 로봇을 위해 동족을 포획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기계의 반대편에 선 채 살아가는 흡혈인 ‘나’와 군인 출신 ‘마리카’. 어느 날 그들 앞에 나타난 인간형 로봇 ‘빌리’는 자꾸만 자신을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인조인간 제작소’를 파괴해야 한다고 말한다.



2. 「예언자」


앞선 「밤이 오면 우리는」 이전의 시간을 다룬 이야기이다. 로봇이 지구를 완전히 지배하기 전, 교사였던 ‘마리카’의 나라는 침략자들의 무자비한 공격을 받는다. 점령 이후, 노동과 교육이 인간에서 기계로 대체되자 침략국은 기계의 임대료와 수리비를 점령국 인간들에게 무리하게 청구한다.


그 결과 인간들은 존엄을 잃고 극심한 빈곤 속으로 추락한다. 이에 마리카는 아이들을 지키고,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기 위해 저항군으로서 목숨을 건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3. 「우리는 악마에게서 왔다」


「밤이 오면 우리는」의 뒤를 잇는 이야기이다. 하루하루를 전쟁처럼 견뎌내던 흡혈인 ‘나’에게 낯선 이가 찾아와 자신을 ‘마리카의 아이’라고 소개한다. 심지어 그는 로봇 ‘빌리’의 존재까지 알고 있었다. 무언가에 지독하게 중독된 채 죽어가는 그를 살리기 위해 ‘나’는 결국 그를 흡혈인으로 만든다.


살아난 그는 기계들이 지배하는 ‘특수 작업 공장’의 끔찍한 실상을 폭로한다. 인간 여성의 몸을 지배하여 강제로 아이를 생산하고, 마약으로 인간을 통제하며, 쓸모가 없어진 인간은 마음과 기억을 빼앗아 로봇으로 개조해 버리는 잔혹한 공간. 


💡


소설은 ‘이름 없는 것들’(흡혈인, 인조인간, 지배당한 여성 등)의 목소리를 통해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다수가 아닌, 소외되고 지워진 소수의 이야기를 전한다. 


소설 속 미래는 참혹한 동족상잔의 장이다. 기계의 지배 아래 놓인 인간들은 공동의 적이 아닌,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눈다. 같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지배하고 지배 당하며, 차별과 공격을 서슴지 않는 우리들의 모습은 기계들의 학살보다도 더 잔인하다. 


모든 SF소설이 그러하듯, 이 작품이 그리는 본질적인 갈등 또한 결국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현대 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 먼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공상과학 소설을 읽으며 지금 당장의 사회적 문제를 뼈아프게 떠올리게 된다는 사실이 못내 서글프고도 아이러니하다.


각자의 우월성을 주장하며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는 지금도, 소수의 나약한 목소리는 총성에 파묻힌 채 존엄을 잃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서로의 손을 잡는 '이름 없는 존재들'의 연대는, 폭력과 억압의 체계를 싸워 무너뜨리며 “소멸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어딘가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