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이야기는 연결되는 우주의 얘기이며
음악에 대한 찬가이며
세상 모든 작은 것들에 대한 사랑의 노래다."
「작가의 말」 중에서
*
경이로웠다.
압도적으로 거대한 상상력과
아름다운 문장들을 한 번에 만나기란 쉽지 않다.
공희경 작가님의 『몸으로 덮인 세계를 본 적 있는가』
2025 제8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작으로
이의 없는 만장일치 당선작이라고 한다.
나 또한 그것에 이의가 없다.
소설은 거대한 세계관을 구성하며 시작된다.
어느 날 모든 생물을 증발시키는 비가 내리고,
그 비에 대항할 수 있는 유전 기술이 개발되며
인간은 두 개의 종으로 나뉘게 된다.
*
작품은 A.D. 2015 과거로 시작해서
'증발비'가 내리는 A.D. 2028 근 미래,
인간의 종이 나뉘게 되는 A.L.과 개동이라는
새로운 기원의 먼 미래까지 광활한 세대를 아우른다.
책을 한 권 다 읽고 나면,
마치 지구와 인류의 역사를 들여다본 듯한 느낌이 든다.
과거에서 현재, 미래에서 다시 과거로
지구와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한다.
소설 속의 미래는
지구와 인류의 미래이면서도 과거였다.
근미래의 표현은 구체적이고
먼 미래는 다소 환상적, 몽환적으로 표현되면서
소설이 진행될수록
마치 신화를 읽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
처음에 읽기 시작했을 때는
마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필력이 느껴질 만큼
정말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소설이다.
이 책은 몇 번이고 다시 읽어야
그 맛을 오롯이 느낄 수 있을 듯하다.
SF 문학을 사랑하는 분들에게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그리고,
조금 고차원적인 로맨스를 느끼고 싶은 분들에게도
적극 추천한다.
우리에겐, 인간에겐 결국 사랑뿐이다.
*
SF 문학을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인류가 존재하는 디스토피아 이후의 세계는
놀랍도록 지금의 현실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 참 무섭다.
지구와 인류가 멸망하게 된 이유를 찾고
그 절차를 다시 밟지 않으려고 하지만,
결국엔 다시 멸망의 길로 들어선다는 것이.
물론 이 또한 우리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상상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설 속 문장에도 나오듯,
어쩌면 그것은 인간의 생존 방식이 아닐까 싶다.
최근 들어 SF 문학을 쓰는 것이
참 어려워졌다는 생각이 든다.
2020년대 초반만 해도
휴머노이드나 스페이스 SF와 같이
과학적 상상 기반의 SF 소설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최근에는 디스토피아를 주제로 하는 소설들이
많이 보이는 것 같다.
(물론 내 관심 주제가 옮겨 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고 있어서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곧 500살을 맞이할 상어 바나는 몸길이 6미터 10센티미터에 달하는 육중한 몸을 이끌고 북위 87도, 서경 1도를 지나 차가운 북극해를 횡단하고 있다. - P11
생이 구르다 구르다 똥통에 처박히면 어떻게 되는가. 멈추는가. 아니다. 썩는다. 그때부터는 썩은 몸을 짓누르며 굴러간다. 감각은 사라지고 굴러간다는 느낌만 남는다. 그때부터 몸은 바퀴가 된다. 내가 싣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도 않아진다. 구르고 있는 여기가 어디인지, 천 길 낭떠러지인지 불구덩이인지 알 필요가 없다. 끝장나기 전까진 그저 굴러간다. 이 무거운 몸을 짓누르는 힘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끌고 가는 거다. 나는 썩었으니까. 바퀴일 뿐이니까. 내게는 위안이 필요 없지. - P23
인생이 변하는 건 한순간의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직선을 옆으로 틀면 점이 된다. 굽이굽이 굴곡졌다고 생각하며 지나온 그 길들이, 하나의 화살로 꿰인 듯 느껴졌다. - P87
언제든 증발할 수 있다는 생각은 나를 기분 좋게 한다. 잡다한 생각마저 휘뚜루마뚜루 날아가 버린다. 생과 줄다리기를 하는 거다. 정말 나한테 이럴 거야? 좋아. 증발해 버리지, 뭐. - P113
"받아들여. 같은 종족에 비극이 반복되면 그건 더는 비극이 아닌 거야. 그 종족의 생존 방식인 거야." - P184
사랑을 이루기란 그렇게나 어렵더라. 사랑노벨상이 있다면 그 자리는 매년 공석일 거야. - P195
해가 질 무렵의 빛깔이 따뜻하다고 느끼는 건 빛이 떠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빛이 없는 긴 밤의 추위와 고독을 알기 때문이다. - P249
살라야, 이 말도 안 되는 세상에서 질량보존의 법칙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커지기만 하는 것이 단 하나 있단다. 그것은 사랑이야. 사랑은 증발하지 않는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건 오늘보다 내일 더 많이 널 생각할 거란 뜻이다. 네가 내 눈앞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 P253
인생이 변하는 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는단다. 변하는 건 힘의 방향이지, 사람이 아니라서. 그것은 시시때때로 휘몰리는 바람과 같이 우리를 쥐고 흔들고 때로는 내동댕이친다. 바람 속에 있을 때는 그 힘이 바람의 것인 줄 모르고 내 것인 줄 착각한다. 떨어져 나온 뒤에야, 우리는 그것의 정체를 볼 수 있다. - P294
우리는 때로 지켜야 할 것이 많아 살아남는 것보다 사랑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잊어버리고 마는데, 결국 그 사실을 알면서도 같은 길을 가고 마니…. - P2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