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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이 차오르는 중입니다
서윤빈 지음 / 열림원 / 2025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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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기후 재난을 주제로 하는
Cli-fi(기후 소설) SF로
각 단편의 인물이나 배경이
다음 단편에도 겹쳐지는 연작소설이다.
*피카레스크 구성: 여러 개의 이야기에 동일한 인물이 출연하는 형태의 이야기 구성 방식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신선한 작품이었다.
작품의 제목, 단편들의 제목,
소설의 내용, 새로운 형식 등
재미난 요소가 가득하다.
열림원의 신간소개에서
『종말이 차오르는 중입니다』라는
제목을 보고 '종말이 오고 있다'도 아니고
'차오른다'니 어떤 의미일까?
하는 궁금증이 한가득이었다.
책을 받고 펼쳐보니
단편들의 제목 또한 심상치 않았다.
완독한 뒤,
제목은 이상 폭우와 해수면 상승 등을
주된 소재로 사용하고 있어
종말이 '차오른다'라고 표현했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아직 단편의 제목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폭우로 잠긴 도시에서 나타난 거대한 게,
발코니에서 죽은 아이의 관을 수장하는 일,
중독되는 해변과 녹아내리는 살점 등과 같이
이전에 읽어 왔던 SF에서는 보지 못했던
신선한 상상들이 펼쳐져 있다.
하지만 신선할 정도로 비현실적인 소설 속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삶은 너무나도 현실적이다.
배달 취소 시 변상해야 할 음식값이 너무나 커
실시간으로 물이 차오르는 폭우 속에서도
배달을 가야 하는 라이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수몰되어버린 집을 떠나지 못하는 가족,
미래를 잃고 인터넷 도박에 빠졌다가
돈을 벌기 위해 생동성 실험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
이토록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서도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이상기후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기후재난 속에서도 변하지 않을
우리의 현실이 더 두렵게 느껴졌다.
*
"여기서 네가 마주치는 생물 중에 정상은 없어. 물고기는 ㄱ자로 생기지 않았고, 까마귀는 원래 다리가 두 개야. 소라게는 플라스틱 물병이나 커피 캔이 아니라 소라 껍데기를 지고 다니고. 절대 아무것도 손대거나 먹으면 안 돼."(p. 150)
기후 재난이라는 공통적 배경 아래 이어지는
7개의 이야기.
■ 게
폭우 속에서 정체 모를 생선을 배달하는 라이더.
■ 농담이 죽음이 아니듯 우리는 땀 대신 눈물을 흘리는데
발코니에서 떠나보낸 아이의 관이 계속해서 되돌아오고, 그 관을 계속해서 다시 떠내려 보내는 아버지.
■ 트러블 리포트
숨이 멎을 정도의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검은 해변 '블랙번'. 그런 해변에 중독된 사람들과 녹아내리는 사람들.
■ 애로 역설이 성립할 때 소망의 불가능성
주변이 전부 물에 잠겨버린 빌라. 그곳에서 3대를 이어 살아가는 한 가족의 기록.
■ 리버사이드 아파트 여름맞이 안전 유의 사항
4월에 평균 기온 35℃를 넘는 시대에 한 아파트의 공고문.
■ 생물학적 동등성
석유가 나온다는 블랙번에 가고 싶어 하는 생동성 실험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자.
■ 생물학적 동등성
실종된 남편을 찾아다니는 '지연'. 도시의 쓰레기를 먹고 다니는 거대한 거머리처럼 생긴 덩어리의 청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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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자연에 조화 따위는 없습니다. 모든 건 생존 투쟁일 따름이지요. 상대를 미워하든 말든 아무 상관 없습니다. 무릇 미움 없이 죽고 죽일 때 더 많이 죽이기 마련입니다." - P108
추억 같은 건 신경 쓰지 마라. 사람은 힘들 때만 과거를 떠올린단다. 추억보다는 안락함을 택하렴. - P120
배가 고픈데도 라면 하나 끓일 마음조차 안 들던 날도 많았어요. 안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먹고 내야 할 힘도 딱히 없었으니까요. 마치 식물이나 곰팡이처럼요. 저는 그것들의 생이 재미없다거나 불행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여유 있는 삶, 욕망만 없다면 그것보다 좋은 게 있을까요. - P157
역시 인간은 고통이 있어야 뭘 좀 배우나 봐요.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고통은 불안을 유발하고, 불안은 인간을 행동하게 하니까요. - P159
흔히 시민은 민들레에 비유되곤 하지만 사실은 덩굴식물에 더 가깝다. 시민은 어지간해서는 죽지도 않고 겨울엔 로제트 상태로 버티는 민들레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 우리가 민초라는 말을 쓸 때, 그건 억척스럽게 버틴다는 뜻이지 세상 융성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 땅에서 그런 일은 일어난 적 없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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