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으로 올라가는 입구는 보이지 않았다.
첫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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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여름]은 김은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로맨틱한 제목과 초록초록한 표지 디자인으로,
언뜻 봤을 때 풋풋한 청춘 로맨스 소설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사회적 문제들과
그 속에서 느끼는 불안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소설 속 인물들은
결코 그 불안 속으로 침잠하지 않는다.
그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희망을 볼 수 있었다.
가족 간의 갈등, 교사 폭행, 뇌물, 인명 피해 사고,
청년 취업난, 환경오염, 동물복지 등
우리가 겪고 있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들을
소설을 통해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소설 속 인물들이 겪는 불안을 통해
문제적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아버지의 부재와
가족이라는 굴레 안에서 오는
압박을 느끼는 '나' (사랑의 여름),
학원생의 폭력과 학원 원장의 협박을 받는 '나'(톱),
테니스 모임의 자격, 수준에 대한 의문과
억울하게 쓴 누명에 지독한 갈증을 느끼는 '성욱' (스매싱의 완성),
엮이고 싶지 않은 인간관계를
자꾸 허용해 버리는 '나' (위해하는 마음),
건물 붕괴 사고로 무너진 벽에 갇혀
그들 부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여자'(바람의 언어),
어느 날 이후로
스스로를 좁은 방 안에 가둔
오빠를 걱정하는 '나'(피피와 구구),
아이를 잃고 난 후
일 년째 밖을 나가지 않는 '나' (실선을 긋다)
70일령의 생을 살게 됨을 알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나(닭)' (오늘의 기원)
인물들이 처한 불안 속에서도
결코 거기에 잠식당하지 않는 모습에서
우리가 현실을 살아갈 때 필요한 자세를 배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의 원인을 단번에 없애버리고
최대한 빨리
정상의 상태를 되찾는"(위해하는 마음)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이번 기회가 아니면
영원히 침묵해야 할지도"(바람의 언어) 모르니까,
"결과는 더 이상 중요치 않"(스매싱의 완성)고,
"더 이상은 함부로이고 싶지 않"(톱)아서,
"책에 나와 있는 연습 문제로는
세상의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피피와 구구)기 때문에,
"이번엔 점선이 아닌 실선을"(실선을 긋다) 그어,
"서로를 도와가며"(사랑의 여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으로 축적"(오늘의 기원)될 수 있도록.
[ 문장 수집 ]
사랑의 여름, 김은
'적당하다'라는 균형감은 왠지 나에게 허용된 감각이 아니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아주 부족하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과도하거나. 그런 양극단이 주는 긴장감 속에 계속 머물러 있다 보면 결국엔 그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 무덤덤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나는 익히 알고 있었다.
p. 14
내 눈에는 제각각의 궤적을 그리는 그래프들이 삶의 수많은 변수처럼 느껴졌다. 상한가와 하한가 사이에서 요동치다가 결국엔 단 한 번도 정점을 찍지 못한 채 하향 곡선을 그리며 추락하고 마는.
p. 15
'더'여서 더욱 절망적이고, '덜'이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삶이라면 이미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게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p. 22
"사람은 무엇보다도 손 간수를 잘해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누구도 너를 함부로 대하지 않거든."
(…)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불안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물어뜯어 엉망이 된 손톱을 들여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서 모두 나를 함부로 대하는 건가.
p. 36-37
감정에도 농도의 차이가 있어서 항상 낮은 쪽에서 높은 쪽으로 흡수되어버리기 때문이다.
p. 37
삶은 더 쉽게 훼손당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삶을 지키려는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그 기회가 잠재되어 있는 것.
p. 47
정말 화가 나는 건 또 쉽게 허용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우리'나 '우리 사이' 따위의 말로 묶을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것, 그리고 번번이 귀찮은 일에 휩싸일 걸 알면서도 결국엔 관여하고 마는 것.
p. 86
"위해(慰解)와 위해(危害)는 발음은 같지만 완전히 정반대의 뜻을 가지고 있어. 하지만 나는 그 상반된 단어가 왠지 하나로 연결되어서 읽혀. 누군가를 위로하고 마음을 베풀어주는 것은 때때로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의미로."
p. 99
"회사 생활도 전쟁에 나간 것과 똑같아. 한편으로는 더욱 어렵기도 하지. 왜냐하면 전쟁에서는 군모나 팔뚝에 색이 다른 띠를 둘러 아군인지 적군인지 확실히 구별하지만 회사에서는 그러지 않거든. 모두가 똑같이 친절이라는 사회적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피아식별 자체가 어려워."
p. 100
전쟁에 나간 군인들도 위기의 순간에는 식별 오류를 일으킨다고, 그런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는 건 결국 믿고 싶어 하는 절박한 마음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더 단단한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나는 결심했다.
p. 102
그 두 가지 종류의 응애 중 어떤 것이 천적 응애인지 아닌지 구별해낼 자신은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둘을 굳이 구별해낼 필요가 없다는 것. 절대로 인내심을 가지고 그 지난한 과정을 지켜봐 주지 않으리라는 것.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의 원인을 단번에 없애버리고 최대한 빨리 정상의 상태를 되찾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p. 105
"너 사는 게 뭔지 아니?"
(…)
"먹는 거? 자는 거? 먹고 자는 거?"
"아니, 틀렸어."
"그럼?"
"날마다 조금씩 쓸모 없어지는 거야."
"매일매일?"
"그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매일."
p. 143
"누구나 찬란히 빛나는 순간이 있는 거란다. 곧 희미해지긴 하지만."
p. 152
여덟 편의 소설을 책으로 묶기 전까지 나는 계속 0에 머물러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상태로 오랜 시간을 지나온 느낌이다.
p. 220-221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