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의 연인들 채석장 그라운드 시리즈
이광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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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연인 #감각적

키워드


우리의 사랑하는 연인과 장소-한다.

한 줄 평


장소들은 사랑의 신체와 같다.

첫 문장

문학과지성사의 인문 에세이 시리즈,

채석장 그라운드 서포터즈로

이광호 작가의 <장소의 연인들>을 읽어보게 되었다.

'장소'와 '연인'이라는 두 단어가

어떤 이야기가 될지 궁금해하며 읽어나갔다.

장소가 연인들의 장소가 된다는 것은 사랑의 수행성의 문제이다. 연인들의 장소에서 '사랑-하다'는 '장소-하다'와 동의어이다. 연인들에게 장소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장소-하다'를 통해 그 장소의 본래적인 특성 이상의 다른 차원을 갖게 된다.

p. 169


연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 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작품은 장소와 사물이 중심이 되어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특정 장소와 사물마다

관련된 하나의 소설이 소개되고,

그 장소와 사물에 대한

'그'와 '나'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작가는 "사소하고 우연한 장소는

연인들의 시간을 통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개별성을 갖게 된다",

"연인들은 장소를 발명한다"(p. 9)고 말한다.

연인과 함께한 장소는 특별해진다.

매일 걷던 길도, 매일 가던 빵집도, 매일 타던 버스조차도

연인과 함께하면 새로워진다.

그렇게 우리는 장소를 발명하고 있던 것이다.


"그 장소에서 연인들은 자신들만의 촉각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작품은 감각적인 표현들로 가득하다.

작품을 읽다 보면 그 장면과 그 감각이

눈앞에서 선명하게 펼쳐지는 듯하다.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의 손목에서 만난 따뜻한 부드러움을 유지할 방법을 찾아낸다. 물방울이 유리창에 스며들지 못하는 것처럼, 손목은 다른 표면에 스며들지 못하고 미끄러져 내린다.

p. 64

한 편의 시를 읽는 것 같기도 하다.

부드럽고 예쁜 문장으로 잔잔히 노래하다

신선한 은유가 갑자기 톡 하고 튀어 오른다.

연인이 된다는 것은 통제 불가능한 하나의 행성이 되는 것이다. 그 행성이 떠도는 이유와 방향 같은 것은 없다.

p. 10

어떤 슬픔은 수영장의 물처럼 귓속으로 들어가 아무리 노력해도 다시 흘러나오지 않고 온몸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다. 가끔은 그 물들이 몸 안에서 출렁거리는 소리를 듣게 된다.

p. 160


<장소의 연인들>은 그 어떤 로맨스 소설보다도

더 로맨틱하다.

가장 로맨틱했던 곳은 욕조였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물이 출렁거리거나 또 하나의 피부와 만나 다른 감각이 시작된다. 욕조의 시간은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는 물의 시간이다. 욕조는 연인들이 가질 수 있는 거의 완벽한 공간이다. 이 공간은 세상에서 가장 좁고 따뜻한 바다로 연인들을 안내한다. 두 사람의 몸이 그 안에 들어감으로써 따뜻한 바다로의 유영이 시작된다. 두 몸의 부피 때문에 물이 갑자기 흘러넘칠 때, 이미 욕조의 항해는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몸속에 함께 들어앉은 쌍둥이 태아처럼 두 사람은 물 위를 유영한다.

p. 57

따뜻하고 촉촉한 공기가 가득 찬 희뿌연 욕실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과

그 공기 특유의 향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장소와 사물에 대한 표현이 감각적이고 새로웠다.

잘 보이는 곳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꺼내어

문장 하나하나 꼭꼭 씹어 삼키고 싶은 책이다.

작품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작품 속 장소와 사물에 대한

나와 연인의 이야기를 떠올려보게 된다.

그와 함께라면 일상 속 공간도

특별하게 느껴졌다는 걸 새삼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아마도 연인들의 시간이 장소를 어떻게 바꾸는지에 관한 생각에서 출발했을 것이다"(p. 177)라는

작가의 후기에서 보듯,

미세한 감정을 흘려보내지 않고

글의 재료로 삼는다는 것이 감탄스러웠다.

주변의 모든 것이 글감이라는 생각 또한 해보게 된다.

참 괜찮은 책이다.

참 마음에 드는 책이다.


📖 문장 수집

장소의 연인들, 이광호


사랑하는 연인들이 장소를 탄생시키는 것은 세상과 구별되는 자신들의 물질적 영역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연인들은 은둔자가 되려는 것처럼 숨을 장소를 찾는다.

p. 11

연인들은 장소 자체를 숭배하거나 의미화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함께 있음'만이 장소의 사건이다.

p, 25

연인들이 머무는 장소의 기본 단위는 집이 아니라 방이다. 그것은 그들이 제도적이고 물질적인 안정에 진입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방은 현재적인 체류의 지점이지만 소유한 곳은 아니다. (···) 연인들이 방에 머문다는 것은 그들이 머무는 장소가 유동적이며 잠재적이라는 말이다. (···) 그 방에서 연인들은 바깥 세계에 대한 감각을 잠시 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방은 외부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공간은 아니다.

p. 31

아파트 발코니가 바닷가 호텔의 발코니보다 영감과 상상력의 원천이 되지 못하는 것은, 그 발코니의 개방감을 제한하는 삶의 안정감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p. 34

한 공간에서 두 사람이 각기 다른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은 기묘한 느낌을 준다. 두 사람은 지금 한 공간에서 각기 다른 곳을 여행 중이다.

p. 39

가끔 책의 활자들은 이국의 식당에서의 읽을 수 없는 메뉴판처럼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책을 읽는 것은 그래서 일종의 기억상실이다. 하나의 문장은 다음 문장에 의해 금방 잊히고 하나의 페이지는 다음 페이지에 의해 잊힌다.

p. 39

'앞'의 세계는 시선의 대상이 되는 곳이지만, '옆'의 세계는 몸을 나란하게 위치시킨다. 가까운 곳에서 더 가까운 곳으로 시선은 이동하고, 뒤돌아볼 것들은 사라진다. 다른 손가락에 닿는 최단 거리를 손가락은 알고 있다.

p. 67

우산은 매력적인 사물이다. 그 안에 숨겨진 관절이 작동하면서 검은 천으로 덮인 챙이 넓은 모자처럼 전혀 다른 공간을 펼쳐보인다. 우산이 펼쳐지는 순간은 두 사람의 최소 공간이 만들어지는 장면이다. 우산은 순식간에 내밀한 공간을 만들어 낸다. (···) 연인들이 우산 아래에 있다는 것은 가장 손쉽게 그들만의 최소 공간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p. 69

연인들은 대개 완전한 현재에 머물지 못하고, 혹은 현재의 완전함 때문에 과거와 미래의 헛된 무게에 짓눌리고 자신을 괴롭힌다. 이미 지난 것과 모르는 시간들이 현재의 영혼을 갉아먹는다.

책을 찾거나 고른다는 것은 자기만의 종교를 찾기 위한 영혼의 편력이기도 하다. 자기만을 위한 일생일대의 단 한 권의 책 같은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갈증을 이곳에서 채울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는 사라지지 않는다.

p. 81

자연스러움을 연기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부자연스러워지는 일은 반복되는 실수이다.

p. 82

냉장고는 생뚱맞은 사물이다. 새벽에 목이 말라 냉장고 문을 열면 당혹스러운 불빛이 얼굴에 쏟아지고, 문을 닫으면 그 작은 세계는 다시 봉인된다. 냉장고 안에 있는 식물과 동물의 잔해들은 사실 죽은 것인데 신선하다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죽음을 유예하는 차갑고 기이한 시간이 그 안에서 웅웅거린다.

p. 164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감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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