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에게 솔직해지기 위한 행동을 누군가는 ‘이기적‘이라 비난하고, 그로 인해 후회하고 자책감을 느낄지도 몰라. 하지만 나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분명한 해나 민폐를 끼친 게 아니라면, 세상의 기준이나 타인들이 만들어내는 잡다한 소음에 휘둘릴 필요가 없더라. 또한 완연한 어른이 되어 솔직하기로 작정한다는 건, 그만큼 리스크를 져야 한다는 것과 동의어라는 것도 알게 되었어. 하지만 감당해야 할 그 모든 짐을 감수하고서라도, 아무리 생각해봐도 ‘솔직함은 살아가는 데 장기적으로 옳은 방법‘인 것 같아. 솔직함을 포기하면 당장의 불편함이나  위기는 모면해도 가면 갈수록 근본적인 만족을 못 느끼 고 얕은 위안‘으로 겨우 연명하거든. 난 그런 거 싫어.
 나는 깊은 충만감을 원하고, 내가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 고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감각이 그 무엇보다도 소중해.

‘나다운 삶‘을 찾기 위해서라면 나는 그 반대 방법이낫다고 봐. ‘하고 싶은 걸 찾기‘보다 ‘하기 싫은 걸 하지 않기‘부터 시작하는 거지. 왜냐, ‘좋음‘보다 싫음의 감정이 더 직감적이고 본능적이고 정직해서야. ‘하기 싫은것 / 곁에 두고 싶지 않은 사람‘ 이런 것들을 하나둘 멀리하다보면 내가 뭘 원하는지가 절로 선명해져. 글쓰기로 치면 일단 손 가는 대로 편하게 막 써놓은 후에,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직감적으로 가지치기하는 거지. 그러면 글이 명료해지면서 내가 애초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가 분명해지지. 더 나아가, 직감적으로 ‘아, 싫다‘라고 느끼면 나를 그들로부터 격리해주는 것이 가장 본질적으로 나를 사랑하는 법‘이라고 생각해.


얼마 전에 읽은 책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보았어요. 디아 작가님의 『사과를 먹을 땐 사과를 먹어요」라는 책인데, 그 안에 현대인의 ‘리액션‘에 대한 글이 있어요. 요약하자면 이래요. ‘현대인은 하루종일 ‘리액션‘이란 것을 하면서 산다. 리액션은 타인의 욕망에 응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이 행위에 몰두하면 할수록 나 자신의 욕망은 점점 거부되고 잊힐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자는 리액션하지 않는 시간을 꼭 확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요. 리액션하지 않는 시간, 타인의 욕망에 응하지 않는 시간,
아마도 언니가 이야기하는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기 위한 태도와 같은 말이겠지요.
 저는 그냥 가끔 솔직해 보이는 가식적인 인간이고, 훌륭한 기저를 품으며 스스로에게나 타인에게나 솔직하게 사는 일은 아직 저에게는 너무나 요원한 일이에요. 그런 저에게 언니가 보여주는 솔직함은 겉과 속이, 타인을 향할때나 스스로를 상대할 때나, 한결같이 분명해요. 보기만해도 시원하고 기분이 좋아져요. 

오히려 거꾸로 ‘난 이걸 할 거야‘라고 너무 강하게 집착하면 그게 더 무리해서 가능성을 좁히는 일이 돼버릴 수도 있어. 이런 유형의 사람과는 관계를 맺지 않는다‘ ‘저런 장소에는 가지 않겠다‘ 등, 아무튼 내가 하고 싶지 않은것들, 안 할 것들을 사소하게라도 조금씩 테두리를 정리해가다보면, 의외로 좋은 것들이 결과적으로 내 곁에 남게 되고, 나만의 기준이 만들어지고, 저절로 나 자신에대해 많은 것을 깨닫게 될 것 같아.
 가끔 경우에 따라서는 ‘이건 하겠다‘나 ‘이건 안 하겠다‘를 넘어, 지금은 아무 선택도 하지 않겠다‘라는 선택지도 있어. 선택을 하지 않겠다는 선택. 지금은 이대로 가만히 있겠다는 다짐도 어떤 상황에서는 대단한 의지와 중심을 필요로 하는 것이더라. 개중에는 그 소란에 초연해서, 담담히 그 상황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애들이 실은 알짜란다. 이런 게 또 은근 내공이 있어야 사능하거든 - P30

한편으로는 네가 이렇게 경계 없이 마음과 수고를 내주는 것이, 어쩌면 남들이 너를 좋게 평가하는 것에 비해정작 너는 스스로를 하찮고 야박하게 바라보는 경향이있어서가 아닐까 걱정돼. 조금 자신감이 없거나 자존감이 부족하거나 원래 실력이 들통날 것 같으면, ‘남들은나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어. 사실 정말 하찮은 인간인데. 그래도 이런 나라도 괜찮다면 기꺼이 도와드릴게요‘
같은 심정으로 ‘타인의 욕망에 부응하려고 애쓰거든.
- P50

아무튼 요조야. 나는 가끔 네가 조금 덜 퍼주고, 더 못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너의 그런 개방성이나 차별하지 않는 평등주의적 태도가 너만의 어떤 부드러운 결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해.
 생각해보렴. 만약 요조가 자신이 가진 자원을 얄짤없이 관리하는 데 능한 사람이었다면, 너의 목소리는 결코 지금의 그 나른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아니었을 거야. 남들보다 조금 더 마음이 헤퍼서 조금 더 손해 보고 상처입는다 해도, 그래도 역시 줄 수 있는 사람, ‘주는 법을 아는 사람은 더없이 근사한 거 아닐까.
- P52

 요조가 우리 모두 ‘있을 때 잘하자!‘라고 말했잖아.
우리가 있을 때 잘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당연히 있을 거라고 간과하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우리는 상대의 존재에 너무 익숙해지다보니 당연히 그 자리에 계속있을 거라고 보는 거야. 나는 그렇기 때문에 가까운 사이일수록 때로는 서로에게 낯설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하나로 똘똘 뭉치는 것‘ 이상으로 ‘각자의 개체로 흩어질 줄 아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 그러면 더 독립적인 사람이 되고, 성숙해지고, 서로가 더 잘 보이게되는 것 같아, 가족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기혼여성 스스로에게도 엄마나 아내라는 ‘역할‘연기에서 벗어나게 하는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은 정기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 P67

강연의 방식보다 강연의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것. 초기에는 꼬박꼬박 PPT 파일 빔으로 쏘고,
무대에 서서 왔다갔다하면서 강연을 했던 것 같아. 어쩐지 강연은 그렇게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나봐. 잘하지도 못하면서. 나는 들러리적인 것들에 신경쓰느니 차라리 강연 내용의 ‘밀도‘를 최대한 높이는 데 더 신경쓰기로 했어. 강연에서 어떤 내용을 전달하느냐가 결국 본질이자 핵심이잖아.
그래서 나는 강연록 원고를 몇 번이고 필요한 만큼 수정해. 가급적 이해하기 쉬운 단어를 사용하고, 이야기의흐름이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는지 확인하고, 단 한 문장이라도 하나 마나 한 소리를 넣지 않으려고 해.  - P80

는 다 작성하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봐. 내가 사람들앞에서 하려는 말이 공유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내가 그주제에 대해 충분한 시간을 들여 스스로의 머리로 사유하고 성찰했는지. 내가 진심으로 깊이 신뢰하고 확신하는 내용을 전달하고 있는지..
거창한 주제나 담론이 아니라도 내가 좋은 마음을 가지고, 진심으로 전달하고 싶은 내용이라면 나는 어색해하지 않을 것이고, 사람들에게 - 거기 있는 모두가 아니더라도 제대로 가닿을 거야. 몇몇이 내 앞에서 자든 말든, 그건 걔네 문제일 뿐이고,

‘잘될 것을 확신하니까‘ ‘난 반드시 해낼 거니까 애쓰 고 노력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나 포함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열심히 하고 거기에 운도 따라주면 어쩌면 원하던 바를 이룰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뿐이지. 하지만 그 이전에 결과와 상관없이 우리는 최선을 다해 애쓰는 그 자체로 생생하게 살아가는 실감을 느끼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발을 푹 담그는 것이 아닐까.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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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를 춤추게 하라 - 당신과 내가 함께 바꿔야 할 교육 이야기
우치다 타츠루 지음, 박동섭 옮김 / 민들레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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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교육의 바람직한 방향은>

종교성-무한히 확대되어가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자신이 소소한 한 점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신의 ‘작음’에 대한 자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가 창조된 이래 계속된 어떤 연쇄과정 안에서 하나의 고리로서 여기에 존재한다는 ‘숙명성‘의 자각, 이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입자에 지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나로서는 이해가 미치지 않는 어떤 연쇄의 결과로,
다름 아닌 지금 이 시간 이 장소에 내가 있다는 느낌, 일종의 생명운동의 연결 말단에 내가 있고 나를 기점으로 그것이 계속된다는 느낌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존재의 불확정성과 확정성을 동시에 느끼는 것, 혹은 자기 존재의 우연성과 필연성을 동시에 느끼는 것, 그것이 종교적인 체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갈등과 대립 속에 있는 인간의 모습을 저는 ‘영적spiritual‘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제가 영적‘이라고 할 때 그 뜻 이 일반적인 종교인이나 종교학자가 사용하는 뜻과는 꽤 다를 거라고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중간에 있는 것, 어느 세계에도 확정적으로 귀속하지 않는 것을 인간 영성의 근원적인 규정으로 보는 아이디어는 즉흥적인 생각이 아니라 꽤 오랜 기간에 걸친 깊은 사색으로 다다른 결론입니다.

영성교육이 있다면, 그 교육은 ‘예‘라는 규범을 형태와 신체기법으로서 먼저 가르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이들에게 종교사를 가르치는 것도, 성구나 경문을 암송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종교의례를 강요하는 것도 아니지요. 단지 감각을 연마해서 미미한 신호에 귀를 기울이고,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소통할 수 있다는 근본적인 사실을 실감하는 것, 그것이 영성교육의 출발점이자 도달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교감할 수 있다면, 실제로 여기 이곳에 살아 있는 신체로 존재하고 만질 수도 있고 목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다르더라도 아무리 미지의 존재라 하더라도 소통하지 못할 리 없다. 저는 장례에서 출발하여 이렇게 합리적인 추론으로 나아갑니다.
공자가 ‘예‘, 즉 사자와의 소통을 6예의 필두로 든 것은 그것을 모델로 해서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에서의 영성교육도 이와 같은 이해의 바탕 위에 서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어느 정도 그 방향이 보이지 않을까요?

현실 사회는 다양한 형태의 종교적 현상이 넘편하고 있습니다. 카스트 교단, 초능력, 뉴에이지, 영성, 정신세계…. 대중체에도 종교적인 것들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공교육이 종교적인 것들과 관계를 거부할 경우 아이들은 어떤 영적 준비도 없는 상태로 종교적인 담론에 노출됩니다.
가정에서 영적 성숙을 충분히 이룬 아이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습니다만, 현재 도시 핵가족 가정에서 아이를 영적 성숙으로 이끄는 교육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결과적으로 영적·종교적인 것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고, 당연히 그 위험을 알지 못하는 아이들이 종교 현상의 홍수에 무방비 상태로 던져지는 겁니다.
교단 종교든 점술가는 모든 종교는 어쩐지 위험한 냄새가 납니다. 영적 성숙은 그 위험한 냄새를 직감적으로 감지하고 불가사의한 것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그 위험을 감지하는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위험한 것들에서 격리된 영적 무균 상태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곳에서 키워진 아이는 처음 만난 종교적인 어떤 것 앞에서 판단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 정의로 ‘영적이다‘는, 바깥과 소통하고 싶다는 지향으로 가득 찬 것에 모든 것이 수렴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이해를 초월하는 경지를 향해서 그 경지를 넘으려고 하는 지향만이 사람을 영적인 존재로 만들어준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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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교육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것>

현대문에서사라진 음악성

저는 지금 국어교육에서 가장 경시되고 있으면서 동시에 가장 중요한 것이 ‘음악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국어교육에서 ‘음音의 문제‘가 거의 고려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교과서에 실려 있는 현대문, 특히 평론 중에 소리 내어 읽었을 경우 울림과 리듬을 생각하고 고른 것은 거의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메이카 사람이 레게 박자에 맞춰서 걷거나 밥을 먹는 것과 똑같이 일본인은 원래 이 여덟 박자를 생활 속 기본 리듬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있는 대학의 음악학부 사이토 선생님한테서 오페라는 이탈리아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오페라 자체가 이탈리아어 음운에 맞게 만들어져 있고 이탈리아어로 부르지 않으면 오페라가 되지 않는다는 거죠. 모차르트에게는 미안한 말입니다만 <마술피리>는 독일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듣다보면 역시 미묘하게 귀에 거슬립니다.독일어에서 흐‘나 ‘히‘로 발음되는 후두음이 아무래도 오페라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나라말마다 그 나라말 고유의 억양과 리듬이 있습니다. 일상 회화에서 나타나는 억양과 리듬을 음악적으로 정리한 것이 그 나라 고유의 음악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현대 국어교육에서는 그 고유의 억양과 리듬 구조를 추려내서 매끄럽게 다듬고 나아가 그것을 음악적으로 승화시켜가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먼저 말을 배웁니다. 의미는 잘 모릅니다. 무엇을 가리키는지도 잘 모르죠.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언어를 뒷받침하는 실제적감각이 없다는 결핍감을 쭉 갖고 있다가, 어느 날 그 그릇에 딱 들어 맞는 내용물을 만납니다. 문자와 읽는 방법만 알고 그 (속) 의미를 모르는 말이 마치 자석이 철을 끌어당기듯이 그 공허를 채워주는 의미를 끌어당깁니다. 언제나 결핍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 결핍을 채우는 방향으로 감각을 심화시켜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가장 먼저 언어의축적이 필요합니다. 먼저 언어의 재고를 쌓아가다 보면, 나의 실감으로재워지지 않았던 그 말이 나의 실감을 풍부하게 합니다.
생각이 남고 말은 부족하다라는 ‘말의 빈곤함’과 말은 남고 생각이 부족하다는 ‘신체 감각의 부족함’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먼저 ‘언어적 확장‘ 속에 던져져야 합니다. 자기 몸의 감각으로는 가늠할 수 없지만 언어만은 알고 있다, 이 같은 언어 상황이야말로 교육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노기충천하다‘든지 마음을 비워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면 불조차도 시원하다‘ 같은 말은 아이들에겐 말만 먼저 있고 신체적 실감이 뒷받침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앎으로써 신체 감수성은 아이를 가두고 있던 일상을 넘어서 바깥으로 확장되려고 합니다. 저는 아이들의 촉수가 바깥으로 확장되는 계기가 되는 현상들을 ‘교육적‘이라고 부릅니다.


감정이 먼저 있고 말이 나오는가, 아니면 말이 있어 감정이 형성되는가? 이것은 꽤 어려운 물음입니다만 우리는
‘말이 감정을 만들어내는 구조에 관해 좀더 깊게 이해할 필요가 있지않을까 싶습니다.

말의 정신적인 힘으로 봐도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 말에는그만큼 인간의 내면을 조작하는 힘이 있습니다.
마음속에 ‘말이 되기 전의 생각‘이 있고, 말은 그 마음을 전달하는불완전한 매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요? ‘말은 불완전한 매체다. 말을 잘 가꾸면 생각의 운반도구로서 성능이 좋아지고, 생각을 효 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교육 현장의 문제로 봤을 때, ‘먼저 생각과 느낌이 있다‘라는 전제를 취함으로써 아이들의 언어가 한없이 빈약해졌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봐야만 합니다. 만약 아이가 "나는 내면은 풍부한데 말이 부족해" 하는 가설을 받아들인 경우-실제로 많은 아이들이 이런 전제를 취하고 있습니다-그 아이에게 말은 늘 종속적인 지위에 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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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로교육이 빠진 함정>

취업활동에서는 왜 저 사람이 채용된 건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채용되거나 떨어질 리가 없는 사람이 떨어집니다. 취업활동을 함으로써 비로소, 학생들은 어떤 기준에서 합격과 불합격 결정이 이루어지는지 수험생에게는 알려지지 않는 선발시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 것 이존재한다는 것을 그들은 지금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분명히 세상에는 그런 것이 있습니다. 합격, 불합격의 기준은 그들이 모를 뿐이지 실은 누가 보더라도 명확합니다. 그것은 수험공부에서의 합격, 불합격을 결정할 때의 기준과는 전혀 다릅니다. 먼저 그것을 납득해야 이야기가 됩니다.
수험공부는 앞에서 말했습니다만 ‘개인 능력의 등급 매기기‘ 입니다. 그런데 취업에서 합격의 기준은 개인 능력의 등급 매기기가 아닙니다.
놀랍게도!


유감이지만 세미나는 입시학원의 진학 클래스가 아닙니다. 여기는 이미 ‘실제 사회’의 선험적인 형태입니다. 여기는 경쟁의 장이 아니라 협동의 장입니다. 개인적으로 능력이 뛰어나도 집단의 능력을 높이는 데 공헌할 수 없는 사람은 이곳에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노동의 장은협력의 장!!!
사회 활동이라는 것은 협동이지 경쟁이 아닙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사회인 여러분들은 마음속 깊이 느끼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대학생이나 대학원생 여러분들은 이것을 먼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집단의 구성원들이 각각의 전문 지식과 기술을 제공하여 그 협동의 성과를 모두가 나누고, 리스크도 손실도 모두 나누는 것이 노동 시스템입니다. 노동의 장은 그런 시스템에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려 고영합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이 일과 저 일 사이의 회색지대에는 실패의 밑씨뿐만 아니라 성공의 밑씨도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혁신이라는 것은 늘 누구의 책임도 아니고 누구의 권한도 미치지 않는 곳에서 탄생하는 법입니다. 틈새 시장‘이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비즈니스 기회는 늘 이미 자원 배분이 끝난 시장의 틈새에서 발생합니다.

지금 시대가 잃어버린 가장 소중한 것은 친구와 상부상조의 공동체를 만들어서 빈곤한 자원을 나누는 ‘예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소중한 것을 천박한 윤택함을 구가한 8,90년대에 뿌리째 잃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가난하지 않으니까요. 그 누구도 상부상조도 연대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20년 동안 일본인은 ‘연대하는 기술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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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들이 20세기 초반 이곳에 살았다. 혁명이 직업이고 역사가 직장이었던 사람들,
1910년, 세 여자는 글자를 깨치기 시작한 어여쁜 소녀들이었지만 어느 결에 공중 납치된 나라의 국민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 우리 집 마당을 쑥밭으로 만들어버리고 구둣발로 내 침실을 휘젓고,
다닌다면 일상은 이미 깨지고 생활은 투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세 여자와 남자들은 삶을 역사에 올인 했다. 한겨울 영하 20도에 허술한 차림으로 서울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걸어서 갔다.
재산을 챙기기는커녕 있는 재산도 버렸고 애인과 가족도 버렸고더 버릴 것이 없을 때는 목숨을 버렸다.
그들은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착취하면 안 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하면 안 된다고 믿었다. 농부는 자기 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아프면 돈이 있건 없건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사람이 평등해야 존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이들은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흥망성쇠를 자신의 생애로 겪어냈고 과학이라 믿었던 역사법칙의 오작동에 목숨을 잃기도했다. 그들은 온전히 시대의 자식들이었다. 폭격 맞은 나라에서 파편처럼 주변으로 튕겨나간 사람들, 그것은 절박하고도 다급한 디아스포라였으며 슬프고도 고난에 찬 글로벌 라이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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