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교육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것>

현대문에서사라진 음악성

저는 지금 국어교육에서 가장 경시되고 있으면서 동시에 가장 중요한 것이 ‘음악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국어교육에서 ‘음音의 문제‘가 거의 고려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교과서에 실려 있는 현대문, 특히 평론 중에 소리 내어 읽었을 경우 울림과 리듬을 생각하고 고른 것은 거의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메이카 사람이 레게 박자에 맞춰서 걷거나 밥을 먹는 것과 똑같이 일본인은 원래 이 여덟 박자를 생활 속 기본 리듬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있는 대학의 음악학부 사이토 선생님한테서 오페라는 이탈리아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오페라 자체가 이탈리아어 음운에 맞게 만들어져 있고 이탈리아어로 부르지 않으면 오페라가 되지 않는다는 거죠. 모차르트에게는 미안한 말입니다만 <마술피리>는 독일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듣다보면 역시 미묘하게 귀에 거슬립니다.독일어에서 흐‘나 ‘히‘로 발음되는 후두음이 아무래도 오페라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나라말마다 그 나라말 고유의 억양과 리듬이 있습니다. 일상 회화에서 나타나는 억양과 리듬을 음악적으로 정리한 것이 그 나라 고유의 음악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현대 국어교육에서는 그 고유의 억양과 리듬 구조를 추려내서 매끄럽게 다듬고 나아가 그것을 음악적으로 승화시켜가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먼저 말을 배웁니다. 의미는 잘 모릅니다. 무엇을 가리키는지도 잘 모르죠.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언어를 뒷받침하는 실제적감각이 없다는 결핍감을 쭉 갖고 있다가, 어느 날 그 그릇에 딱 들어 맞는 내용물을 만납니다. 문자와 읽는 방법만 알고 그 (속) 의미를 모르는 말이 마치 자석이 철을 끌어당기듯이 그 공허를 채워주는 의미를 끌어당깁니다. 언제나 결핍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 결핍을 채우는 방향으로 감각을 심화시켜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가장 먼저 언어의축적이 필요합니다. 먼저 언어의 재고를 쌓아가다 보면, 나의 실감으로재워지지 않았던 그 말이 나의 실감을 풍부하게 합니다.
생각이 남고 말은 부족하다라는 ‘말의 빈곤함’과 말은 남고 생각이 부족하다는 ‘신체 감각의 부족함’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먼저 ‘언어적 확장‘ 속에 던져져야 합니다. 자기 몸의 감각으로는 가늠할 수 없지만 언어만은 알고 있다, 이 같은 언어 상황이야말로 교육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노기충천하다‘든지 마음을 비워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면 불조차도 시원하다‘ 같은 말은 아이들에겐 말만 먼저 있고 신체적 실감이 뒷받침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앎으로써 신체 감수성은 아이를 가두고 있던 일상을 넘어서 바깥으로 확장되려고 합니다. 저는 아이들의 촉수가 바깥으로 확장되는 계기가 되는 현상들을 ‘교육적‘이라고 부릅니다.


감정이 먼저 있고 말이 나오는가, 아니면 말이 있어 감정이 형성되는가? 이것은 꽤 어려운 물음입니다만 우리는
‘말이 감정을 만들어내는 구조에 관해 좀더 깊게 이해할 필요가 있지않을까 싶습니다.

말의 정신적인 힘으로 봐도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 말에는그만큼 인간의 내면을 조작하는 힘이 있습니다.
마음속에 ‘말이 되기 전의 생각‘이 있고, 말은 그 마음을 전달하는불완전한 매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요? ‘말은 불완전한 매체다. 말을 잘 가꾸면 생각의 운반도구로서 성능이 좋아지고, 생각을 효 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교육 현장의 문제로 봤을 때, ‘먼저 생각과 느낌이 있다‘라는 전제를 취함으로써 아이들의 언어가 한없이 빈약해졌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봐야만 합니다. 만약 아이가 "나는 내면은 풍부한데 말이 부족해" 하는 가설을 받아들인 경우-실제로 많은 아이들이 이런 전제를 취하고 있습니다-그 아이에게 말은 늘 종속적인 지위에 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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