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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된 장소에서 ㅣ 언더그라운드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워낙에 저자의 후광이 크기 때문에 책을 읽기 전에 저자를 먼저 보지 않을 수 없다.
독특한 자신만의 문학세계로, 흔히 말하는 ‘믿고 보는’ 팬들을 전 세계에 가지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이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그 인기만큼 많은 비난도 –전 세계적으로-받고 있다. 뭐 그는 그런 비난에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긴 하다. 어쨌거나 그가 그렇게 비난 받는 이유를 보면 철저히 개인주의적이고, 시대적 고민이 없다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인터뷰집은 조금은 ‘하루키적’이 아닐 수도 있다.
내가 처음 언더그라운드라는 책에 대해 들은 정보는 이 책이 소설도, 수필도 아닌 사린가스 사건의 피해자들을 인터뷰를 한 인터뷰집이라는 것이었다. 하루키의 필력도 알고, 사린사건이 엄청난 사건인 것도 인정하지만, 같은 사건을 겪은 일반인 피해자들의 인터뷰를, 그것도 60명이 넘는 사람들의 인터뷰만을 싣다보면 스무 명쯤만 가도 비슷비슷한 이야기들이 반복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생겼다. 책이 도착했을 때는 두께를 보며 조금은 지루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첫 장을 넘기고 한참이 흐른 후 나도 모르는 사이 마지막장이 끝나 있었다. 한 명 한 명의 삶과 철학, 그래서 사건을 바라보는 모두 다른 태도와 사건에 대한 정의, 바뀐 삶에 대한 감정 같은 것들을 각각의 이야기로 쏟아져 나왔다. 백 명이 백 가지 감정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아주 당연한 일인데도, 이런 제 각각의 반응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 지금까지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우리가 그것에 대해 무엇인가를 느끼기도 전에, 언론이 먼저 사실과 관점, 내가 느낄 감정까지도 편집하고, 정리해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도식화된 패턴을 피하기 위해 하루키는 그 60여명의 피해자들의 감정을 정리하는 대신, 한 명 한 명에게 깊숙이 다가가 그들의 평범한 하루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고, 어떤 혼란 속에 있는지를 들어주었다.
증언자의 개인적인 배경 취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은 ‘피해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명확히 부각시키고 싶어서였다. 거기에 존재하는 한 인간을 ‘얼굴 없는 많은 피해자 중의 한 사람’에 그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p. 21
나는 이것이 하루키의 힘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시대정신이라는 큰 가치를 이야기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그 자신도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작은 것들을 분명한 목소리로 이야기 하고 있었다.
내가 이 책에 대해 느낀 놀라움을 잠재우고 있을 무렵, 2편이 나왔다.
직접적인 가해자는 아니지만, 가해자가 속해 있던 옴진리교에 몸을 담았던 사람들을 인터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언더그라운드2 –약속된 장소에서’는 내게 1권이 준 충격의 세 배 정도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는 이 책을 쓴 이유를 자신의 두 가지 물음으로 대답했다. 하나는 ‘옴진리교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하는 물음, 다른 하나는 ‘결국 그런 사건이 벌어졌는데도 그것을 일으킨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게 아닌가’ 하는 물음.
어쩌면 평범하고 당연하지만, 우리가 지나쳐갔던, 혹은 지나쳐가야만 했던 물음으로 시작된 2권은 인터뷰의 보조자 역할 정도만 했던 1권과 달리 하루키의 색깔과 그가 가진 의문들을 더 적극적으로 나타났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그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하는 물음 속에서 읽어 나간 그들은 아주 특이한 사람들일 거라는 나의 예상과 달리 그들은 평범했고, 역설적이지만 보통 사람들보다 ‘선한 동기’가 확실한 사람들이었다.
개중에는 ‘이 사람은 세간에서 잘 살아갈 수 없겠다’ 싶은 사람도 분명 있었습니다. 일반의 가치관에서 애당초 완전히 벗어나 있어요. 그런 사람이 인구 중 몇 퍼센트 정도일지는 모르지만, 좋고 나쁘고를 떠나 그렇게 사회 시스템 안에서는 해쳐나갈 수 없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언더그라운드2. p299 하루키의 말 중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배제시키면 사회가 건전해진다고 믿고 있어요.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언더그라운드2. p300. 하야오(정신과전문의)의 말 중
어쩌면 하루키의 표현대로 이런 비극이 일어났을 때 우리 모두는 ‘정의’라는 마차에 올라타서 가해자를 비난하는 쉬운 편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본질적으로 무엇이 문제였는지 생각해보고, 고민하는 것은 이성적, 감정적으로 품이 많이 드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품을 들이지 않고는 하루키의 말대로 사린사태와 같은 사태는 언제든지 일어날 것이다. 비단 일본만의 일이 아니라 자살률이 몇 년째 1위이고, 매일매일 사건사고가 이어지고 있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매사에 좀 더 성실하게 깊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을지도 모른다. 마음에 조금쯤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주위 사람들과 원만하게 소통할 수 없어 약간은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기표현 수단을 제대로 찾아내지 못해 자존심과 열등감 사이를 격렬하게 오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일 수도 있고, 당신일 수도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과 위험성을 내포한 컬트 종교 사이에 가로놓인 한 장의 벽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얇을지도 모른다.
언더그라운드 2. p. 333
온전히 하루키만의 세계로 이루어진 그의 소설과 수필에 비하면 이 책은 인터뷰가 대부분이라 그의 색깔은 희미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는 분들도 있겠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그 어떤 작품들보다 그가 세상을 향해 가지는 질문들과 그의 색깔이 잘 드러난 작품이라 생각한다. 단편적인 인터뷰가 이어지고 있어 어느 페이지를 펼쳐 읽기 시작해도 좋다는 것과 언더그라운드2 마지막 부분의 하루키와 정신과의사인 하야오의 인터뷰에서 고개를 끄덕거릴만한 좋은 말들이 많은 것도 장점이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언더그라운드를 읽으며 대구지하철 참사가 자꾸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희생자의 숫자로 그 비극성을 따질 수는 없지만, 사린사건의 사망자가 12명인 것에 비해 대구지하철 참사의 희생자는 192명이나 된다. 그럼에도 당시 기사들을 찾아보니 하루키가 말한 언론의 패턴들만이 있을 뿐 진실도, 고민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고통 속에 있음에도, 아직도 근본적인 문제점이 무엇인지 묻는 진지한 질문이 전무하다는 것이 슬프다. 늦지 않게 우리도 묻고, 고민하고, 개인의 입장에서 기록을 남기는 일들이 진행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