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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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시(詩)가 어렵다고 느끼기 시작하면서 시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먼 당신'이 되어버렸다. 그저 단어들로 이루어진 문장만을 단편적으로 느낄 뿐 그 숨은 의미와 감정을 내것으로 만들기가 힘들고 시와 친하지 않은 내게도 마음에 담아둔 좋아하는 시가 몇 편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최영미님의 <선운사에서>이다. 5년 넘게 쓰고 있는 플래너의 맨 앞장에 그 시가 곱게 적혀있어 생각날 때마다 펼쳐 읽곤 한다.

 

"꽃이 지는건 쉬워도/ 잊는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선운사에서' 중에서)


 

어렵게만 느껴지던 시가 때로는 분석도 필요없이 마음을 와장창 흔들어 놓을 수도 있다는걸 새삼 느끼게 해준 이 시가 인연이 되어 최영미씨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아끼는 시집으로 내 책장 한켠에 자리잡고 있다. 군더더기 없는 말끔한 시어들을 쏟아냈던 그녀가 산문집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에서는 어떤 말들을 내게 건낼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을 읽어갔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1부는 여행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고 2부는 미술, 영화, 음악 등 문화 전반에 대한 이야기들이 들어있다. 하지만 굳이 나누어 놓을 필요가 없을만큼 예술에 대한 작가의 감상들이 책 전반에 흐르고 있다. 여행지에서 만난 건축물들에 관해, 그림과 화가에 관해, 음식에 관해, 그녀의 심장을 채운 음악에 관해, 심지어 한 나라의 대통령인 오바마에 관해 그녀의 솔직 담백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다.

 

"헤매지 않았으면 어느 화사한 봄밤에 친구도 만나지 못했고, 숨은 보물의 맛도 몰랐을 것이다." (p.28)

 

내가 길을 헤맸던게 언제였더라.

 

익숙한 일상에선 낯선 길을 만날 일이 거의 없고, 여행을 떠나도 네비게이션이 달린 차를 이용할때가 많으니 길을 잃을 일도, 누군가에게 길을 물을 일도 줄었지만 그래도 여행을 떠나서는 길을 헤맬때가 생기게 마련이다. 특히 차를 갖고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하는 여행에선 길을 잃을 일도 많다.

 

차들만 다닐뿐 아무도 걷지 않는 산속의 아스팔트 길을 헤매며 걷다가 만난 보길도의 작은 돌로 뒤덮인 아름다운 바닷가, 그곳에서 들었던 차르르 차르르 돌구르는 파도소리, 낯선 기차역에서 내려 정처없이 헤매다 들어간 허름한 식당에서 먹었던 기가막히게 맛있던 순두부, 한적한 길에 차를 세워두고 여유자적 걷다가 마주친 숲내음 물씬 풍기던 소나무숲, 이름도 없고 길도 없던 검은 바위들만 가득했던 바닷가에서 만난 이름모를 새들...

 

돌아보니 나도 길을 잃고 헤매지 않았으면 만나지 못했을 아름다운 것들을 많이 만났다. 그리고 그렇게 많이 걷고 길을 물어가며 헤맸던 여행이 기억에도 오래 남는다. 어쩌면 최영미씨의 말처럼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을 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낯섬이 주는 설레임과 뜻밖의 아름다움을 만나기 위해서 길을 잃고 헤매는 진짜 여행을 떠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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