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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17세에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로 화려한 데뷔를 했던 천재작가 오츠 이치. 그의 책이 새로 나올때마다 빠지지 않고 읽었고 물론 경중의 차이는 있겠지만 실망했던 책은 한 권도 없었다. 오츠 이치를 처음 만났던 <ZOO>는 내게 뒤통수를 세게 맞은듯한 충격을 줬고 출판금지 처분이 내려져 19세 미만 구독불가 딱지를 붙이고 재출간되는 헤프닝을 겪은 <GOTH>는 역시 오츠 이치라는 확신을 갖게 만들었다.
오츠 이치의 작품들은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풍긴다. 암울한듯 하면서 감동적이고 잔인한듯 하면서 따뜻한... 공존할 수 없을것만 같은 느낌들이 어우러져 오츠 이치만의 향기를 품고 있다. 이 책 <베일>도 역시 오치 이치다웠다. 독특한 상상력으로 현실과 환상이 뒤엉켜있고 오싹하고 으스스한 느낌이 난다. 이 책을 휴가를 떠난 바닷가에서 읽었는데 주위의 소음도 모두 잊고 집중해서 읽다가 발 끝에 닿은 파도에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이 책은 아주 얇아 200페이지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 글씨도 큰 편이다. 분량이 적어서 그랬기도 하겠지만 이야기에 몰입하다 보니 책을 다 읽는데는 고작 몇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페이지가 넘어갈 수록 너무 얇은 책이 아쉬워지기만 했다. 이 책에는 <천제요호>와 <A MASKED BALL 그리고 화장실의 '담배'씨, 나타났다 사라지다> 두 편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천제요호>는 야기라는 사람의 편지로 시작된다. 자신이 급히 떠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쿄코라는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야기의 편지와 쿄코의 시선으로 본 사건이 교차로 등장해서 이야기의 비밀이 서서히 드러난다. 병약했던 어린시절 심심풀이로 친구들 사이에 유행했던 초혼술의 일종인 '고쿠리 상'을 혼자서 했던 야기. '사나에'라는 혼령과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고 4년 후 죽게될거란 그녀의 말에 그녀의 아이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는다.
그 후로 야기는 다칠때마다 몸이 조금씩 이상하게 변하고 고향을 떠나 방랑하게 된다. 길에 쓰러져 힘들어 하는 야기를 쿄코가 발견하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 온통 붕대를 감고있는 야기에게선 묘한 악의가 풍기지만 쿄코와 가족들은 그런대로 야기와 잘 지내게 되고 쿄코 오빠의 도움으로 공장에 취직까지 하게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뜻밖의 사건이 벌어지고 야기는 자신의 이야기를 쿄코에게 편지로 남기고 떠난다.
<A MASKED BALL>은 고등학교의 화장실 낙서에 얽힌 이야기다. 우에무라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다른 학생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화장실을 들락거리다가 깨끗한 화장실 벽에 남겨져 있는 낙서를 발견하게 된다. 첫 낙서였던 정자체, 우에무라, K.E, 2C 갈색머리, V3. 이렇게 다섯 명은 서로의 존재를 모른 상태로 낙서를 통해 대화를 하게 된다.
정자체의 낙서가 하는 말들이 학교 내에서 실제 사건으로 번지게 되고 우에무라가 알고 있는 미야시타란 여학생을 정자체 낙서가 응징의 대상으로 지목하자 그 소녀를 보호하기로 우에무라는 결심한다. 정자체 낙서의 주인공을 유인하기 위해 함정을 만들지만 우에무라와 친구들이 오히려 위험에 빠지게 된다. 광기에 사로잡힌 정자체 낙서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 책은 내가 읽은 오츠 이치의 책들 중 수작으로 꼽히진 않는다. 하지만 오츠 이치의 책인만큼 기본적으로 재미있고 흥미로우며 그만의 으스스하고 독특한 분위기는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그의 다음 작품이 어떤 책이 될지 모르지만 나는 주저없이 그의 책을 집어들거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