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에 흩날리는 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4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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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대체 어느 후미지고 험난한데서 구르다 온 사람일까. 보는 사람을 쏘아보는 날이 선 눈빛에 각 진 하관, 따뜻한 동시에 차가워보이는 묘한 입술과 귀티를 지우는 입 근처의 점, 기리노 나쓰오의 사진을 보고 난 인상이다. 그녀의 소설은 얼굴에서 읽히는 기기묘묘한 느낌처럼 그로테스크하다. 하지만 그 한마디로는 은유할 수 없다.

 그녀의 소설을 처음 본 건 6년 쯤 전 <아임쏘리 마마>였다. 이후 <잔학기>를 읽으면서 인간이 타인을 괴롭히는 것 가운데 가장 기괴하고 잔인한 방식이 있다는 것을, 그것은 그러한 고통을 받아 본 사람이 관계를 이용해 자신과 타인을 함께 괴롭힐 때 가능해진다는 점을 알았다. 극악무도한 잔인함은 그런 사람으로 태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기리노의 소설 속 인물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편이다. 기리노의 소설 속 화자는 "나를 용서하지 마세요. 나도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테니까요."라는 말을 한다 (잔학기, 다크). 그러면서 이 소설들은 보여준다. 용서받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탐정 무라노 미로가 등장한 연작 가운데 이 소설은 남편이 자살한 직후 우울함과 분노에 빠진 상태에서 친구 요코의 실종을 접하고 그의 애인 나루세와 그녀의 흔적을 찾아다니며 시작된다. 동시에 그녀의 일과 사랑, 인생의 긴 여정 또한 시작된다. 연작 소설이라면 이 얼굴에 흩날리는 비를 먼저 보고,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과 다크의 순서지만, 나는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을 가장 먼저, 그리고 나서 다크를, 그 후이 에 소설을 접했다. 어느 소설에서도 무라노 미로는 차가운 동시에 뜨겁고 냉철하면서 연약하다. 그리고 그녀는 다크에서 가장 강렬하게 인생의 파도를 탄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그 직전 허무와 쓰디쓴 인생의 맛에 처절하게 젖어가기 시작할 무렵이다. 그래도 미로는 뜨겁다. 열정과 사랑을 갖고 있는 여자니까. 두려워하면서도 천천히 그녀는 친구 요코의 행방을 찾으면서 그녀의 옛 애인이던 나루세와 동행한다. 아마도 직감했을 것이다. 그녀와 여러모로 반대였던 요코를 사랑하는 또한 요코와도 여러모로 다른 나루세와 엮일 것을. 첫 인상에서 짜증나는 상황 속에 그를 맞이했지만 이 소설 속의 미로는 여러가지 면에서 나루세를 의식하고 그에게 관심을 둔다. 속물이었던 요코의 행방을 따르면서 그녀를 질투했다가 연민을 느꼈다가 하면서 그녀가 사랑했던 나루세라는 남자를 살핀다. 동반자의 자살로 아마도 마음 속 뿌리 깊은 나무가 뽑힌 것 같은 심정으로 잘생긴 남자를 맞이하는 미로는 또한 연약한 심성도 갖고 있으므로 그에게 끌렸을 것이다. 하지만 냉철한 미로는 감정의 갈피에 흔들리면서도 철저하게 추궁해간다. 의심의 한 자락도 그냥 날려버리지 않고 섬세하고도 집요하게 따라잡아 나루세를 추궁한다. 결과적으로 사랑하는, 사랑했던 남자에게 상처입히면서 자신에게도 해를 가하는 것은, 남편을 몰아세웠던 자신을 단죄하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열에 들뜬 상태로 그를 가장 차갑게 몰아세우면서 가까스로 바로 선다. 미로는 한없이 심약한 여자도 아닌 것이다. 그녀 나름대로 깊은 상처를 회복하고 구렁에서 나왔으니까. 이 것 하나로도 섬광처럼 날카롭고 해일처럼 깊은 인생의 심연을 맛 본 셈이어서 나 스스로 그녀에게 빠진 시간이 꽤 오래 갈 정도였다. 물론 이 소설 속 미로는 다른 연작에서 또 다른 인생의 깊이를 체험하면서 다시금 얕은 수렁에 빠지기도 하여, <다크>에서 비로소 완성이 되지만 그 칠흙같은 어둠 속을 걷는 첫번째 걸음으로서 그 고통스러운 아름다움은 직접 빠져보지 않고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기리노만이 가능한 기쁜 동시에 슬프고, 나쁘면서도 좋고, 아프면서도 시원한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녀 소설을 읽고 나면 그처럼 묘한 기분에 빠진다. 아마도 그녀가 보는 세상 속 사람들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점을, 그렇다고 해서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점을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래서 많은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 고통스러운 아름다움은 한 번 겪어보아야 알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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