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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당연한 판정승을 거둔<트와일라잇>과 함께 조용히 개봉했던 스웨덴의 <렛미인>을 하도 많은 사람들이 칭찬하여, 올 여름, 다시한 번 재개봉을 하길래 달려가서 영화부터 보았다.
새파랗게 얼어붙은 하늘, 어른보다 먼저 타락해가는 아이들 속에 상처받던 한 영혼 오스카르.핏빛으로 아프게 성장해갈 때, 그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을 예리하게 스치던 무언가가 있었다.
자신도 핏빛으로 있되 자라지도 늙지도 않는 어느 또래의 영혼. 바로 엘리.
그 깊고 아득한 핏빛 아름다움에 당장 매료됐다.
그리고 이 책부터 샀다.
스웨덴의 한 작은 마을에서 엄마와 둘이 사는 12세 소년 오스카르.
학교에서 욘니, 토마스 등 몇 명의 힘 센 아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책을 좋아하고 이야기와 상상의 힘을 믿고 따를 만큼 감수성이 풍부한 오스카르는 늘 나무에 욕을 하며 칼을 나무에 찔러넣고 그 아이들에게 해코지를 했다고 믿으며 낮동안 받은 울분을 해소하곤 했다.
어느 날 옆집에 엘리라는 이름모를 여자아이가 찾아온다.
언제나 반팔이나 얇은 옷만을 걸치고도 추위를 모르고, 달고 맛난 사탕이나 초콜릿도 먹지 못하며, 말하는 것도 아주 옛날식으로 할 때도 있어 별난 인상을 받았던, 그러나 그 모습이 너무 피 맺히도록 아름다워 오스카르는 엘리에게 빠져든다.
어느 날 근처에서 끝도 시작도 없는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은 점점 오스카르가 있는 곳과 가까워진다.
여기까지 영화와 스토리라인은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영화를 보며 떠오른 차디차고 어둡고, 눈부시고 조용한 눈밭이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운 아름다움으로 비치던 영화와, 이 소설 속에 묘사된 어둡고 음울하지만 괴팍하고, 그러면서도 오밀조밀 사람들이 많고, 문화적인 감수성도 높은 기기묘묘한 마을의 이미지는 달랐다.
영화 속은 더 없이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영화 속에 약간 디테일만 더 하면 소설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소설 속 이야기는 조금 더 우울하고 깊고 맑은 어떤 것을 표상했다.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이유는, 이 소설이 설명하는 어떤 깊이와 영혼의 문제에 우리말로 어떻게 가까이 표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엘리는 오스카르. 오스카르는 엘리.
오스카르가 증오를 가졌던 곳에 엘리도 똑같이 증오를 갖는다.
오스카르가 처음 나무에 칼을 꽂는 제의식을 행하고, 엘리는 나중에 그 소년들을 물 속에서 처단한다. 깊은 수영장은 마치 엄마의 뱃속을 상징하듯 잠겨있던 오스카르를 밖으로 꺼내고, 소녀와 소년은 하나가 되어 여행을떠난다.
물론 그 사이에 배치된 여러가지 이야기 또한 빼 놓을 수 없는 감동들을 선사한다. 엄마와 결혼을 하고 싶어하는 경찰관이 죽이고싶도록 미운 오스카르의 이웃 형 톰미. 아직 아버지를 마음 속에서 보내지 않았지만 엄마와 사귀는 경찰관은 죽은 아버지나 톰미에 비해 너무 감수성이 없고 그저 씩씩하기만 한 남자다.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지막, 엘리의 아버지이자 애인역할을 한 호칸. 시체가 되어 몸이 난자 되어도 죽지 못하고 반 시체가 되어 떠도는 호칸의 해체된 몸뚱이를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노래하며 있는대로 난자한 톰미. 그것은 자신 안의 아버지를 잔인하게 떠나보내는 제의처럼 보인다.
또 하나의 여인. 비르기니아. 엘리에 의해 뱀파이어로 변화되는 과정을 생생히 겪은 비르기니아. 비르기니아에 의하면 자신 안에 어떤 죽지 못하고 기생하는 새로운 생명체가 의도와 달리 살아나가는 기분이라고 설명했다. 그것에 지배당하는 자신이 싫어서 연인 라케를 두고 불로 화한다.
(영화 속에서는 이게 오스카르의 엄마로 표현됐지만.)
라케와 비르기니아의 늙고 잔잔한 사랑은 어떻게 그려내야 할까.
다시, 이 아름답고 슬프고 잔혹한 이야기를 어떻게 글로 표현해야 할까.
그리고 엔딩 부분은, 영화처럼 오스카르가 엘리의 또 다른 희생양이 될 거라는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은 하지 말아달라고 작가는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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