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는데 내 옆에 누워있는 사람이 스코비아가 아니란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느낌이 달랐다. 나한테 등을 돌리고 누워있었지만 입고있는 옷이 어제 저녁 베젠트가 입고있는 옷이라는걸 단박에 알아차렸다. 깨지않게 조심하면서 얼굴을 확인했더니 아니나다를까 베젠트였다. 스코비아는 이미 일어났는지 아니면 다른곳에서 잤는지 방안에 없었다. 방을 나와서 부엌에 들어가니 스코비아가 아침 준비를 하고있었다. 스코비아는 날 보자마자 “일어났어?”하며 말을 건넸다.

“베젠트가 왜 네 자리에서 잤어?”
"그게 술에 막 취해서 와가지고.“
”취해? 왜?“
”몰라. 아수 오빠가 데려왔는데 급한대로 눕혔지. 뭐.“
“아수씨가? 언제 왔는데?”

스코비아는 손가락 끝을 인중에 대고 잠시 생각했다.

“새벽 다 돼서 온 것 같은데.”
“다 큰 처녀가 술에 취해 새벽에 들어왔어? 좀 어이없는데.”
“아수 오빠가 데리고 왔다니까.”
“아수씨는 돌아간거야?”

스코비아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했다.“결혼은 한 대?”“그건 안 물어봤는데.”스코비아는 손질이 다 끝난 야채들을 들고 부엌밖으로 나갔다. 나도 베젠트 일은 잠시 잊고 아침준비나 도와야겠다.

할아버지도 베젠트가 새벽에 들어온 걸 모르고 있었다. 아마도 스코비아 혼자서 베젠트가 아수씨와 들어올때 나간것 같다. 베젠트는 점심이 지나 햇빛이 한창 강할 때가 돼서야 일어났다. 아직도 비몽사몽하는지 옷도 갈아입지 않고 머리를 헝클어트린채로 계산대로 나왔다.

“할아버지. 어제...”
“일단 좀 씻고와라.”

베 젠트는 할아버지 말을 듣고 깨달았는지 나오다말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베젠트는 옷을 갈아입고 나름대로 얼굴을 정리하고 나와서 할아버지 옆에 쌓여있던 책더미 위에 앉았다. 저거 엄청 비쌀텐데 막 앉아도 되는거야? 베젠트는 고개를 푹 숙이고 힘없이 한숨을 쉬었다.

“애들이 뭐라더냐?”
“저같은 고아년이랑 지체높은 아드님과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대요.”

고아년이라. 어째 남 얘기 하는 것 같지 않은데. 그런 말을 하는데도 베젠트의 말투는 평소와 다를것이 없었다.

“그 놈들. 여전히 그따위 생각으로 살고있는건가.”

“헤, 어쩔수 없죠. 저도 반쯤은 포기하고 가긴했지만...”

베젠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걸 느낄수있었다. 그 떨림은 점점 커져 이내 내 마음 깊숙이 닿았다. 할아버지도 그걸 알아채고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앉았다. 베젠트가 평소와 다르지 않다고 느낀 것은 내 멋대로 생각한 것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조그만 희망은... 가지고있었다고요. 아수가 고백하고.... 할아버지가... 허락하셨으니까.... 계속 잘 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고요... 으..흐윽...”

푹 숙인 베젠트의 얼굴 아래로 눈물이 떨어지고있는게 보였다. 언제부터 저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을까.

“가자마자... 맞고 욕부터 들었...어요... 아수 부모님 얼굴도... 제대로 보지못했어요! 흐윽! 그냥! 그냥 내동댕이쳐졌다고요!”

할아버지는 별말없이 베젠트 말을 듣기만했다. 측은한 표정으로 베젠트를 보는 할아버지를 보니 왠지 처음부터 이렇게 될거란걸 알고있었을까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아니면 할아버지가 허락했으니 아들도 어쩔수없이 허락할 거라 생각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아수도 똑같아요! 제가 맞는걸 그냥 보고만 있고! 부모님 설득했다더니 전부 거짓말이었고! 할아버지도 미리 말 좀 해주지 그랬어요! 그럼 이렇게 안됐을지도 모르잖아요!”

베젠트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화를 막 내면서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질러댔다. 정확히 날 꼬집어 얘기하지않았지만 내가 알고있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걸 들으니 기분이 좋지않았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바로 자신에게 화내는 말을 들으면서도 얼굴색하나 변하지 않고 그저 초연하게 듣기만 하고있었다. 나는 밖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쳐다보는걸 보고 황급히 일어나 문을 닫았다. 그 사이 베젠트는 소리지르던 것을 멈추고 이번엔 입술을 깨물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난 내 자리로 돌아가지않고 문 앞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고 설사 할 수 있는게 있다하더라도 그런 기분이 들지않았을 것이다. 베젠트는 지멋대로야.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쓰지 않아. 하고싶은거 멋대로하고 멋대로 울어버리고. 뭐야 저게.

“그래, 울고싶으면 울어라.”

할아버지는 두손을 뻗어 베젠트를 품에 안아주었다. 베젠트는 그 상태로 한참동안 꺽꺽대면서 울었다. 저게 연륜에서 나올수있는 행동일거다. 나였다면 먼저 따귀를 때리고 욕했을걸.





베젠트는 그 날부터 방에 틀어박힌채로 지냈다. 잘 씻지도 않았고 밥먹을때도 나오지않아서 스코비아나 내가 직접 배달해줬지만 그 마저도 잘 먹지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가끔씩 볼 때도 베젠트는 벽을 바라보고 누워있기만 할 뿐이었다. 그 동안 써오던 책은 말 그대로 중단되었다. 서고는 다시 스코비아 혼자서 지키게됐다.

“할아버지. 베젠트 언니 언제까지 저러고있을까요?”

할아버지는 여전히 흔들의자에 누운채로 눈도 뜨지않았다.

“글쎄, 내키고 싶을 때까지 저러고 있겠지.”

그 때 안쪽에서 스코비아가 걸어나오더니 할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 아수오빠 보통 지금 시간에 어디에 있는지 알수있을까요?”
“왜 그러냐?”

내 말에는 꼼짝도 하지않았던 할아버지가 눈을 뜨고 스코비아에게 시선을 줬다.

“얘기 좀 하고싶어서요.”
“아수씨 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잖아?”궂이 찾아갈 필요가 있나?
“그 날 언니가 나갔다왔을때부터 아수 오빠 서점에 안 오잖아.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마냥 기다릴려니까 답답하니까.”

아, 그러고보니까 벌써 꽤 오래됐는데 아수씨는 그 날부터 온적이 없지.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러냐?”

스코비아는 아무 말도 하지않고 우물쭈물 서있기만 했다. 바보, 그냥 뭘할지 말하면 되잖아. 왜 저렇게 어정쩡하게 서있는거야.

“베젠트 언니 때문에요.”

좀 일찍 말하란 말이야. 할아버지는 잠시 아무말 없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광장 근처에 강있는 동네 알지? 거기에 있는 학교에 다니고있으니까 가서 기다려봐라. 거긴 사람들이 많이 다니니까 운 나쁘면 찾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네, 그럼 갔다올게요.”

스코비아는 할아버지와 내게 간단하게 눈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스코비아는 어린애가 놀러가는 것같은 표정을 짓고있었지만 나가는 모습이 어딘가 무거워 보였다. 그런데 베젠트 일인데 괜히 나섰다가 무슨 소리 듣는거 아닐까. 아니, 나보다 베젠트를 잘 아니까 내가 생각하진 말자.




서점 안이 좀 어질러져 있어서 정리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베젠트가 방에서 나왔다. 베젠트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물었다.

“스코비안 어디갔어?”

보아하니 나오기전에 서고에 먼저 들어갔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베젠트 얼굴이 생각보다 많이 야위어있었다. 하긴 그 동안 밥도 제대로 안 먹었으니...

“아수씨 만나러 나갔어요.”

느낌상 적당히 거짓말로 둘러대는게 좋을 것 같지만 난 거짓말은 못하는 성격이다. 베젠트가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빠르게 다가와서 깜짝놀라 넘어지고 말았다.

“아, 미안. 미안. 그런데 스코비아 언제 나갔어?”
“꽤 됐어요.”

바닥에 넘어지면서 맞은 엉덩이가 너무 아프다.

“나 때문에 스코비아가 귀찮은 일을 하게됐네.”

베젠트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지만 그런데도 이상하게 여태까지 듣던 목소리보다 훨씬 또렷하게 들린것 같았다. 베젠트가 내 얼굴을 보더니 씩 웃으면서 머리를 쓰다듬고 할아버지가 누워있는 흔들의자로 걸어갔다. 내가 이상한 표정이라도 지었나?

“앙탈은 다 부렸냐?”
“하하...”베젠트가 힘없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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