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는 갑자기 베일을 벗었다. 존재는 추상적인 범주에 속하는 비공격적이던 모습을 잃었다. 존재는 사물이라는 조형물을 만들기 위한 찰흙원형 자체였고, 그 나무뿌리는 그런 존재 속에 빚어져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렇게 말하기보다는 나무뿌리와 공원의 철책, 벤치, 듬성듬성한 잔디밭 등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사물의 다양성이나 사물의 개별성은 가상에 지나지 않았으며, 표면을 바르는 칠에 불과했다. 그 칠이 녹아버리고, 괴물처럼 물컹거리고 무질서한 덩어리, 노골적이며 무섭고 추잡한 알몸의 덩어리만 남아 있었다.

존재하는 것은 그 무엇도 희극적일 수는 없다. 가벼운 희극에 나타나는 어떤 장면과 어딘지 닮긴 했지만, 그 유사성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당혹스러운 존재자들이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거기에 있을 이유가 손톱만큼도 없었다. 존재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겸손하게, 막연한 불안을 품으면서, 다른 존재에 대해 자신을 잉여로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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