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는 많은 한계를 갖고 있었지만 근대 민주주의는 루소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저명한 인류학자이자 구조주의의 선구자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1908~ 2009)는 루소를 "우리 만인의 아버지"라고 명명했습니다. 철학자 황광우는 《사회계약론》을 "혁명의 모태", "민주주의의 산파"가 된 책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사회계약론》의 첫 페이지에 루소는 "제네바 시민 장 자크 루소가 씀"이라고 적어놓았습니다. 저는 이 소개를 보면서 가슴이 찡했습니다. 루소의 삶은 기구했습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사회계약론》을 금서로 분류했고, 프랑스 정부와 제네바 정부는 루소를 체포하기 위해 영장을 발부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국으로 망명합니다.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1778년 사망하는데 그 후 11년이 지난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발발합니다. 1794년 루소의 유해는 국립묘지 팡테옹으로 이장됩니다. 팡테옹 건물 입구 정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위대한 사람들에게 조국이 감사를 표한다 Aux grands hommes la patrie reconnaissan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