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부르주아 계급과 그 국가장치가 계급투쟁에 스스로를 적응시키고 노동자계급 스스로가 전유한 바를 그 착취형태돌과 압제형태들에 ‘통합‘시키는 능력을 과소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지오르나멘토aggiomamento를 실현할 줄 아는 국가장치를 통해 이루어지는 부르주아 계급지배가 존속하는 한, 이 적응형태들을 질적 변화로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국가장치의 기능의 과정과 의미를 변화시키는, 그리고 이 국가장치 내에서 그 적응능력과 통합능력을 부러뜨리는, 간단히 말해 이 국가장치 내에서 그 권력의 형태들 자체를 부러뜨리는 ‘단절‘이 개입해야 합니다. - P201
우리는 마르크스가 사회주의에 관해 말했던 것, 즉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공산주의적 생산관계 사이의 이행기, 다시 말해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라는 점을 진지하게, 정말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음의 단순한 현실, 즉 사회주의적 생산양식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우리가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공산주의의 낮은 형태, 즉 이행기가 존재한다(마르크스)는 점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우리는 다음의 현실, 즉 사회주의적 생산양식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연히) 사회주의적 생산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레닌의 다음과 같은 관념, 즉 계급투쟁은 사회주의라 불리는 이행기에 새로운 형태하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유사한 형태들과의 가시적인 관계 없이, 하지만 실제적으로 진행된다(그리고 계급투쟁이 이렇듯 사회주의하에서도 지속된디는 것의 증거는 국가가 그 사회주의 내에서 존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는 관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 P207
모든 질문 전체를 사로잡았던 것은 의식, 노력, 영웅 주의, 그리고 피에 의해 유지되지 않는다면 하나의 독재상태로 빠져버리고 마는 하나의 독재(부르주아 독재)와, 목숨을 걸고 싸울 줄 아는 노동자계급의 독재(프롤레타리아 독재), 이 둘 사이에서 동요하는 무자비한 투쟁에 관한 날카로운 관점입니다. "독재라는 단어는 거칠고, 유혈이 낭자한 엄칭난 단어이며, 두 계급, 두 세계, 보편사의 두 시대 사이의 죽음을 향한 투쟁, 무자비한 투쟁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우리는 그러한 단어들을 허공에 던져버리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이 단어는 부르주아지의 계급투쟁에 의해 말살당했던 모든 노동자 희생자들의 피를 함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상황이 ‘유혈이 낭자‘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두 계급의 죽음을 향한 투쟁을 표현하는 이 거칠고 위대한 단어가 우리에게 남습니다. 이 단어를 우리는 우리의 논의에서 ‘허공에‘ 던져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람이 이 단어를 날려버리도목 이 단어를 바람에 던져버리지 않습니다. -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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