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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기른 다람쥐 ㅣ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29
이상권 지음 / 자음과모음 / 2013년 2월
평점 :
고양이가 기른 다람쥐. 제목부터가 내용을 연상케 했다. 표지에 그려져 있는 삽화는 분명 동물들을 위한 축제인 듯 보이지만 내용 하나하나를 읽어갈 때마다 안타까움만 자아냈다.
중간마다 책갈피를 꽂지 않고 한 번에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지루하지 않은 스토리 구성과 다른 책들과는 조금 다름이 있었다. 동물에 관한 이야기라 해서 결국 마무리는 그것들의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는, 뻔한 결말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은 겉만 몇십 번을 보아도 알 수 없다.
나도 기억이 난다. 조류독감, 그리고 구제역. 항상 테레비전을 틀 때마다 나오는 장면은 하나의 거짓말도 없이 똑같았다. 흰색 옷을 입은 사람 여럿이 동물을 잡아다 끄는 장면, 그리고 많은 사람의 땀과 눈물.
단어만 들어도 귀를 꾹 막게 된다. 살처분이라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숨을 바삐 쉬어가는 생명을 어떻게 땅에 묻을 수 있는지. 이 책은 그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의 심리, 동물의 모습을 잘 묘사해 읽어나가기가 수월했다.
첫 번째 이야기 삼겹살에서, 주인공의 오빠는 구제역이 퍼졌을 당시 직접 가축을 살처분을 하게 된다. 돼지 위에 돼지가 떨어지고.. 이 문장만을 읽었을 때에는 웃기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내용상의 흐름으로는 전혀 유쾌함이 묻어나지 않는다. 슬플 뿐이다. 돼지의 꿀꿀거리는 소리가 음성지원서비스처럼 귀 안을 후벼 팠고 그 사이에서 허우적대는 군인 두명. 정말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영화든 책이든 인간보다 못한 인간을 돼지로 형상화하는 경우가 있다. 동물 중 인간이 아닌 네발로 걸어 다니는 가축, 뚱뚱하고 더럽고 위를 쳐다보지 못하는 가축.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주제를 내세우고 싶을 때 소,말 보다는 돼지를 앞세운다. 그런데 본문 중, 살처분을 시키는 과정에서 돼지를 구멍에 파 던지다가 두 명이 그 안에 들어가게 된다. 갇히게 된 셈이다. 그곳에서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돼지로 보였다는 표현이 있었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것을 표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더럽고 냄새난다며 평소에는 싫어하다 그것이 식탁 위 반찬으로 올려지면 좋아라하고 열심히 먹어대는 삼겹살.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이 돼지의 생명을 빼았는다는 등의 이유로 끔찍해하지 않는다. 왜? 원래부터 우리가 먹어왔던 것이니까. 그런데 구제역으로 인해 가축을 살처분해야 했던 그때. 어쩌다 우리가 그것들을 살처분해야 했는지 원인을 알아내야 하지 않을까? 어쩌다 우리가 그것을 '구제역'이라고 칭해야 했는지를 말이다. 간단하다. 인간이 초래했던 일이었다. 언제부터 동물이 조그마한 우리 안에 갇히며 살아야 했고 자연의 이치, 흐름을 거슬러야 했는지. 구제역의 원인에 대해 무조건 인간의 잘못 때문이라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영향'을 끼친 것은 어느 정도 있지 않을까. 그런 인간이 돼지로 보인다는 말은 작가의 의도를 잘 나타내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재산이 날아간다 해서 눈물을 흘린 걸까? 그저 돈 때문에? 물건이든, 생명이 깃들여있는 무엇이든 오랫동안 그것과 함께하고, 커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생기는 것이 애착과 정이다. 그리고 그것을 공들이고 함께한 시간이 세월이다. 세월은 절대로 돌이킬 수 없고 시간 또한 항시 앞으로 나아가는 녀석이기 때문에 과거로 갈 수 없다. 재산은 어떻게 해서든 다시 시작해 불려놓을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은 다시 돌이켜 시작할 수 없다. 피붙이 같았던, 자식 같았던. 세월은 보장할 수가 없다.
인간이 돼지로 보이는 순간, 모든 것은 끝이 났다고 생각한다. 바이러스는 새로운 형태로 몇 번이고 모든 생명에게 다가온다. 그것에 의해서 죽음은 꼭 그 뒤를 따랐고, 결국 인간들은 바이러스를 이겨낼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바이러스, 그 자체를 없앨 약.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종플루가 발생했던 과거에서, 이제 미래에는 또 다른 형태로 진화한 바이러스가 인간을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또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막아낼 도리를 만들어내고 이겨낼 것이다. 나 또한 신종플루가 유행했던 당시 걸린 ‘피해자’중 한 명이었지만 이겨냈으니.
그러나 가축만은 아무런 약 없이 살처분만이 도리였던 그때. 인간이 사건, 어느 실수로 그것을 반성하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꾸는 데에는 너무 많은 생명의 희생이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제 몇 번이나 더 많은 동물의 죽음이 있어야 할까. 상상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지만 언젠간 또다시 찾아올 테니, 그 점이 슬플 뿐이다.
몇 마리의 닭에서 그의 몇 배로 불어난 닭의 생명. 몇 마리의 돼지에서 그의 몇 배로 불어난 돼지의 죽음.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책이었다.
태어났을 때는 다람쥐로 태어났지만 키워준 어미 같은 존재가 고양이라는 이유로 그의 습성을 따르려는 다람쥐. 내가 무엇으로 태어났는지는 중요치 않다, 어떠한 방식으로 자라났는지 그것이 매우 무섭다. 나를 낳아준 부모와 나를 키워준 부모에 대한 정의 정도가 조금씩은 다르듯. 자신이 늑대인 줄 알고 숲에서 늑대처럼 '어릴 때부터' 생활하고 생존했던 늑대 소년, 소녀처럼. 그들은 언어를 배우고 글을 쓰는 데만 몇 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만큼 환경은 사람이든,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너무나 중요하다.
사람들은 많이 잊는다. 짐승과 인간의 연관성을. 더 나아가 동식물과 인간의 연관성을 말이다. 인간의 곁에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사라지면 인간 또한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또 사람들은 많이 착각한다. 자연이 사람을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연을 따라가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자로 보이는듯할지라도 '결국'엔 사람이 자연을 따라가게 돼 있다. 자연이 사람을 따라갈 수 있다면 점점 뜨거워져만 가는 지구를 이전의 지구로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왜 그러지 못할까? 보금자리를 내어주고, 정착할 수 있게 하여준 자연의 고마움을 잊은 채 그것과 어울려 가길 바란다면 너무 큰 바람이 아닐까? 점점 잃어만 가는 자연과 사람 간의 균형에서 이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도 엄연한 자연의 일부인데 왜 자연으로부터 분리를 원하는 것일까. 그것이 자유라고 생각하는 걸까. 어리석은 믿음, 판단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지금 우리를 해친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결과물이 나오기 전까지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구제역, 조류독감, 신종플루. 모두 과정일 뿐이다. 결과물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일까.
영화에서 보았던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대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인간의 처절한 비명이 땅속에서 들려오지는 않을지. 생존자만을 위한 세상이 올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