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판을 타고
윤고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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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당에 자루가 묻혔다. 몇 년, 아니 몇 개월이 지났을까. 마당 흙에서는 엄청나게 커다란 슈퍼 지렁이가 나온다. 마당 흙에 심었던 채소에도 변화가 생겼다. 어떤 것은 아주 작아지고 어떤 것은 아주 커진다. 또 마당 흙에 심었던 꽃도 변했다. 제 철이면 피우던 꽃을 이번에는 피우지 않았다. 크기도 그대로다. 좋은 변화인지 나쁜 변화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이런 변화는 마당에 자루가 묻힌 다음에 벌어졌다. 그러니까 원인은 마당에 묻힌 자루이다. 그 자루를 없애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당에 묻힌 자루를 치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당에 자루를 묻으러 왔던 사람도 마당에 자루를 묻으라고 했던 사람도 마당에 자루를 묻어도 좋다고 말했던 사람도 마당에 자루를 묻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마당에 묻은 자루가 마당에 좋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그 자루를 치우지 않았다. 자루가 묻힌 채로 마당 있는 집은 유명해졌다. 게임 몬스터가 등장하는 장소로 유명해졌다. 아이들이 뛰노는 장소로 바뀌었다. 그 때서야 마당에 자루를 묻으러 왔던 사람도 마당에 자루를 묻으라고 했던 사람도 마당에 자루를 묻어도 좋다고 말했던 사람도 마당에 자루를 묻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마당에 묻은 자루가 마당에 좋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그 자루를 치우겠다고 선언했다.


우리 마음에도 이렇게 묻어 놓은 자루가 있다. 교제를 할까 말까 결혼을 할까 말까 이사를 할까 말까 독립을 할까 말까 이직을 할까 말까 퇴사를 할까 말까 이민을 할까 말까 인생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며 묻은 이것을 선택한 이유와 이것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들. 일상생활을 하는데 크게 불편하지 않다. 하지만 불쑥 이런 이유 때문에 이것을 선택하다니 불쑥 이런 이유 때문에 이것을 선택하지 않다니 불쑥 후회의 길로 이끈다. 그 후회는 보통 일상생활을 하면서 잠잠해지지만 불쑥 불쑥 불쑥 횟수가 많아지면 제대로 잠들지 못한다.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이것을 선택해야만 했던 이유가 확실해질 때 역시 이것을 선택하기를 잘했다고 역시 이것을 선택하지 않기를 잘했다고 확인한 다음에야 불쑥 불쑥 불쑥 튀어나오지 않는다.


당신이 지금 불쑥 튀어나오는 감정 때문에 힘들다면 아직 당신의 선택의 결과가 나지 않았다는 증거다. 당신의 불쑥한 마음은 당신의 일상생활이 쌓이고 쌓이면 당신에게 보여줄 것이다. 보이는 것이 부디 좋은 방향이기를.


*위 감상문은 개인 블로그에 올린 내용과 동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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