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순례자
김춘추 지음 / 문학수첩 / 2002년 10월
평점 :
절판


김춘추 시인이 최근 '유년의 그 등 푸른 심해를 헤매고 헤매다 재수 좋게 작살로 잡은 기억의 활어'로 다섯 번째 시집 《어린 순례자》를 발간했다. 그는 자신의 어항에 든 이 활어들을 날 회로 먹든 매운탕으로 먹든 조림으로 먹든 독자의 처분대로 하라는 말도 곁들였다. 그럼 시인이 권하는 대로 싱싱한 날 회로 먹어보자. 희야에게 고추를 달아주는 몽정기 이번 시집에는 몇몇 시에 국한된 얘기지만 (또, 이런 표현을 써도 좋을지 모르지만) 유년기에서 바라보는 아득한 에로티시즘을 느낄 수 있어 독자의 읽는 즐거움을 키우고 있다. 유년의 기억이기에 시공의 경계가 불분명하지만, 오히려 상상의 폭은 훨씬 자유롭다.

한여름밤 원두막, 아이들은 수박 서리에 바쁘고 '모기장 안에서는/구름 속에서 볼일을 다 본/달이 킥킥 웃으며/내려다보는 줄 모른 채 기어이/두 그림자 엉켜 한 그림자 되고 있다('古夜' 중에서).' 정작 수박을 탐내는 척하면서 달빛을 통해 훔쳐보는 아이들의 킥킥거림이 능글맞다. '고추를 도둑 맞았으니/소피도 앉아서 보는 가여운/희야를 생각다가 그날 밤 내 꿈에서/난, 싫다는/희야에게 기어이 내 고추를 달아주었다('고추 이야기' 중에서)'는 데서는 남자라면 한번쯤 경험했을 몽정의 그 첫 날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은 자가 떠나면 인적이 끊기는 상여집도 기억으로 살아난다. 시인의 기억에는 '손금에도 없는 인연으로/겨울 다리 밑에서 눈과 눈이 만난/눈썹 없는 총각과/역시 눈썹이 한 올도 없는 처녀가/가랑잎 긁어 모아/달디단 꿈 같이 꾸던 집('상여집' 중에서)이 상여집이다. 천형의 문둥병을 앓아야 했던 남녀의 눈물겨운 사랑에 '밤이나/낮이나 삘-릴리리/봄 버늘피리 소리에/겨울이/문 밖에서 눈만 흘기다 가는 집'이 그곳인 것이다. 상여가 흰 버스로 바뀐 지금 아득한 얘기로 남는, 동네에서 가장 외진, 사시사철 뭇 영혼의 냉기가 감돌던 집이다.

하필 밤나무골에 과부촌이 하필 밤나무골에 과부촌이 있었던가. '밤꽃 핀다야/우얄꼬/과부댁은 인두로 허벅지 지지니('小曲' 중에서).' 시에서 과부와 밤나무는 동일시된다. '아랫도리 구멍이 크게 나/남몰래 들쥐나 다람쥐가/들어가 새끼라도/치면 큰일이다 싶어/누군가가 밤송이로/콱 틀어막아 놓은, 젊지도/늙지도 않은 그 밤나무가('동행' 중에서)' 생각나 그곳을 찾은 시인은 '곡기를 끊고 시름시름 앓는/꼴이 안쓰러워 하늘이' 데리고 갔다는 서글픈 뒷얘기를 듣고 만다. 과거 우리의 관습이 만들어냈던, 삶을 죽이는 삶의 질곡이 아닐 수 없다. 보릿고개를 넘느라 꿔다 먹은 쌀 서말에 서방을 맞아야 하는 처녀의 아픈 얘기도 있다. '이제는 없는 하늘나라/첫 동네에서 눈썹이/가장 아름다운 큰애기별이/머리를 올린다네('처서가 지나면' 중에서).' 유년이었음에도 부당하다 느꼈기에 기억에 맴도는 것은 아닐지. 아마도 풋풋한 첫사랑이었을 게다. 고향마을 여울의 바윗돌이 시인에게 '니, 수박 향 찐한/그 가이내 찾아왔제('숨긴 사랑' 중에서)' 묻는다. 그러나 시인은 '미친 놈!' 내뱉으며 오십 년 전 은어 새끼의 뒷날 족보를 캐러 왔노라며 '그 가이내'를 부인하고 만다. 그런데 몇 번 읽다보니 궁금한 점이 하나 있다. 옛 여울을 찾았다가 첫사랑을 떠올린 것인가, 아니면 첫사랑을 떠올리다 여울까지 닿은 것인가. 풍경과 정서가 갖는 서열의 모호함이다. 그 때문에 하나의 시론(詩論)으로도 읽힘직하다.

보리고개 넘던 한국적 정서 몇 편 시에서 에로티시즘적인 묘사를 단편적으로 모아본 데서도 느낄 수 있지만, 전체 시집의 표현 하나 하나가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를 담고 있다. 1944년 남도에서 태어난 시인이 한국전쟁을 비극적인 가족사로 몸소 겪고 보리고개를 넘어가며 보낸 유년기를 증언하는 것이기에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처럼 '점심 잘 먹은 대낮에('낮달' 중에서)'도 '외사촌 큰누야가/몰래 갖다 준 참봉댁 송편' 맛을 떠올리며 군침을 삼킬 수 있는 것이 이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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