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솔시선(솔의 시인) 3
허만하 지음 / 솔출판사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일본은 있다> 같이 제목이 <...다>의 종결어로 끝나는 책들을 의도적으로 기피하는 병이 있었다. 유행을 따르면 속물근성이 붙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허만하의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를 손에 들고 읽기 시작한 것은 그런 식의 제목 때문에 한참을 망설인 끝이었다.

1. 존재의 관계를 표현한 '틈'

그러나 이 시집은 나의 속물 걱정을 일축했다. 예전에 놓아버렸던 감수성의 갈피들을 하나하나 일깨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 증거를 대 보라고? 구구한 얘기는 접고 실제로 이 시집에서 '틈'이라는 제하의 시 한 수를 놓고 보자.

시인은 세상에서 맺어지는 온갖 관계들을 틈이라는 공간적 단어 속에 집약하고 있다. 그 틈은 연인의 포옹에서도 발견되고, 뼈와 살, 영혼과 육신 사이에도 존재한다. 현실(빵)과 이상(꿈) 사이에 벌어져 있는 아득함도 틈으로 인식되고, 이국적인 원두커피의 향내와 정액빛 밀크 사이에도 틈이 보인다. 더구나 틈 사이를 조절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도 눈에 띈다. 향내와 밀크 사이의 틈을 저어 원두커피를 완성해내는 스픈은 시를 짓는 있는 시인 자신일 수밖에 없다.

시인은 '존재는 틈이다'라는 진술로 틈이 곧 존재의 필연적인 양상임을 일깨운다. 거시적이든 미시적이든 관계라는 것의 사이에는 항상 틈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더 나아가 시인은 틈을 '손이 쑥쑥 들어가는 적막한 틈'으로 규정함으로써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시인의 진술은 존재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나 고고학적 탐구의 결과를 보고하는 양식이 아니다. 순간적으로 세상의 기미(미묘한 움직임)를 간파했더라도 모름지기 시인이라면 그 깨달음을 시로써 말해야 하는 것이다.

2. 변혁의 가능성을 품은 '틈'

어느새 '틈'이라는 어휘는 그의 시를 움직이는 핵심어가 되어버린다. 이 시집에는 잘려나간 산허리의 모습이 몇 번 등장하는데, 거기서 드러나는 지층의 속살에서도 틈이 존재한다. 그 틈에서는 지상을 거쳐갔던 온갖 욕망들이 세월을 지운 채 엄연하게 살아남아 자신의 존재를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 틈을 바라보면서 시인은 지상을 거쳐간 자들의 욕망을 측정해보고 그 욕망이 우리의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음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다른 시 '바위의 적의'에서도 틈은 중요한 모티브이다. 바위의 단단한 틈 사이로 '갈맷빛 물이 솟구쳐 바다가 되고' 들풀을 길러내어 세상이 부활하기를 꿈꾸는 것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틈은 세상을 바꿀 가능성의 공간이다.

허만하의 시 역시 틈이다. 그의 시는 자신의 인식과 자신이 선택한 시어 사이의 틈에 다름 아닌 것이다. 마치 시니피어(기의)와 시니피앙(기표)의 관계를 연상시키는데, 시니피어와 시니피앙의 틈이 해체철학과 포스트모더니즘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었음을 인정한다면 틈은 진정 혁명이 잠재한 곳일 수밖에 없다.

<장자>에 나온 얘기 한 토막을 곁들여보면 틈의 의미를 좀 더 흥미롭게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옛날 중국 땅에 칼 잘 쓰는 사람이 있었는데, 얼마나 칼을 잘 썼던지 수십년간 소를 잡아도 칼 가는 법이 없었단다. 날이 항상 시퍼렇게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뼈와 살의 틈 사이로 날을 집어넣어 칼질을 하기 때문에 칼날이 무뎌질 틈이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틈에 대한 인식론은 상당히 오랜 계보를 가지고 있을 듯하다.

3. 마음에 쏙 드는 하나의 시구

나는 시집을 읽다가 마음에 쏙 드는 시구 하나를 발견하고는 한동안 읽기를 멈추고 말았다. '이름없는 절터에서'라는 제하의 시에서였다. '서라벌 터전에 서면 나그네도 절터의 메타포에 불과하다'라는 시구가 발걸음을 잡았던 것인데, 그 구절이 나의 눈에 쟁쟁하게 살아 있다.

얼마전 별세한 서정주의 시를 읽다가 '내가 꽃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꽃이 나를 바라보고 있음을 깨닫는다'는 내용의 시를 보고는 무릎을 친 적이 있었는데, 그와 맞먹는 감동이었다. 우리 선조의 옛시에서도 자연과의 동화를 자연과의 합일을 이만큼 표현한 예는 드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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