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의 고백
이덕일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여기 사라지고 지워진 '패자의 기록'을 복원하려고 애쓴 저자 이덕일 과 같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뒤주에 갇혀 여드레를 굶어 죽은 사도세자, 영조가 대부분의 기록을 없애 그의 아내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쓰인 대로 정신병을 앓다 완벽주의자인 영조의 미움을 사 비명횡사 한 줄로만 여겨지지만 한중록 역시 승자의 기록에 지나지 않았다.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했지만 살려달라며 자결하지 않자 뒤주를 가져오게 한 자가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이란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가. 

 경종을 독살하고 왕위에 오른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마저 자신의 권력을 넘보는 정적으로 여겼고, 나라의 이익보다 당파의 이익을 앞세우기에 급급했던 노론은 지금의 야당격인 소론인 사도세자를 정신병이란 조작으로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그 당시 조선은 왕의 나라가 아닌 '노론의 나라'였으며 영조 역시도 경종 당시 노론의 택군(왕의 동생을 왕세제로 봉함)이 없었으면 왕의 자리에 앉을 일이 만무했으니, 당시 조선은 신하가 왕을 세우고 세자를 죽이는 한심한 놀음판 이였다. 

 선왕 경종을 독살한 과거에 발목 잡힌 영조가 소론의 상소를 빌미로 기나긴 피의 숙청을 단행하자 홀로 소론을 위해 방패막이 가 되어 정조의 미움을 사게 되는 발단이 되는데 말로만 탕평책을 쓴 영조보다 소신껏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궐내 야당 세력을 보호하려 했던 사도세자가 오히려 성군으로서의 자질이 명백하다고 생각된다. 본심을 속이고 영조나 노론의 화살을 피해갈 수 도 있었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내가 보기엔 사도세자의 몸속에 흐르는 왕의 피가 그런 소인배나 할 행동을, 자신을 속이는 행동을 허락하지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사도세자가 정신병을 앓았다면 어떻게 무려 14년 동안 대리청정을 수행할 수 있었겠으며, 죽기 2년 전 피부병을 고치지 위해 온양에 행차를 했을 때 신민들이 세자의 여러 덕행을 칭송할 일 또한 만무했어야 한다. 노론인 생모 영빈 이 씨와 역시 노론인 세자비 혜경궁 홍씨와 장인 홍봉한에게 마저 버림을 당하고 소론마저 씨가 말라버린 궁궐에서 아무에게도 의지 할 곳이 없었던 사도세자는 술과 여자에 빠져 미친 척이라도 해서 자신에게 겨눠진 죽음의 화살을 피하고 싶었을 터이다. 그토록 심한 스트레스 속에서는 없던 신경증이라도 생길 판이지 않는가.

사도세자는 문무를 겸한 군주의 자질을 갖추었다. 자신이 무예에 관한 뛰어난 전문가였으며, 무예에 관한 새로운 방법을 담은 '무기신식' 이란 책을 반포했을 뿐만 아니라 북벌을 꿈꾼 마지막 군주였다. 당파의 이익만을 위해 현실에서의 안정을 구하던 노론에게 북벌은 위험한 발상 이였고 사도세자를 제거해야할 또 하나의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한중록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홍봉한과 풍산 홍 씨 가문을 변명하기 위기한 조작에 지나지 않고 역사적인 기록과 상반된 부분도 많다. 홍봉한은 사도제자의 아들 세손이 왕위에 오를 것을 두려워했고, 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홍봉한의 아들이자 혜경궁 홍씨의 동생 홍낙임은 정조 독살 사건을 지휘하는 수장 노릇을 한다. 

 책을 읽기 전엔 정신병을 앓고 뒤주에서 굶어 죽은 세자에 대한 막연한 연민이 마지막 장을 덮자 군주에 대한 존경과 아쉬움으로 바뀌었다. 나라의 이익을 생각하기보다 일신의 영광과 당리당락 만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정치판의 모습은 이제나 그제나 다름이 없어 한 숨이 절로 난다. 멀리 중원의 잃어버린 땅을 되찾으려는, 북벌의 꿈을 꾸던 사도세자는 못 따라갈망정, 망국의 사대적 꿈에 빠져 있는 모습들을 보면 이 나라 백성은 어찌 복이 이다지도 없을까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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