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 - 박완서 산문집
박완서 지음 / 열림원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호미는 박완서님이 두부 이후 5년만에 낸 산문집 이다.
책을 처음 받아들고 '호미'란 책의 제목이 참 박완서님 답다라는 생각을 했다.
호미란 제목에서 호미가 일구는 흙의 질감과 내음이 느껴지고,
꾸밈없이 소박한 우리네 농촌의 풍경이 손에 잡힐듯 그려지고,
나아가 박완서님의 튀지 않고 겸손하고도 정직한 문체와도 닮아있다.
요새 겉 멋만 잔뜩든 작가들이 외국 시에서 나온 싯구를 에세이집의 제목으로
붙이는 것과는 비할데 없이 고풍스럽고 오히려 품위마저 느껴진다.


구리의 아차산 아래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땅집(전원주택) 생활을
10여년 하고 계신 박완서님은 봄이 되면 마당에 피는 꽃과 나무에게 말을 걸고
백여가지의 꽃들의 이름을 출석부삼아 부르며 "돌이켜 보니 자연이 하는 일은 다 옳았다"
라고 자연에 순응하는 모습에서 벌써 일흔을 넘기신 노작가의 연륜을 느낄 수 있다.


[작년에 그 씨를 받을 때는 씨가 종말이더니 금년에 그것들을 뿌릴 때가 되니
종말이 시작이 되었다. 그 작고 가벼운 것들 속에 시작과 종말이 함께 있다는
그 완전성과 영원성이 가슴 짠하게 경이롭다.] - p45


 박완서님은 작가 본인의 경험을 특유의 담백하고도 세밀한 관찰력으로 작품을
그려내고 있는데 자신의 어릴적 경험이 녹아 있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가 그러하고, 초등학교 입학하며 시골에서 처음 서울로 올라와 생활했던 이야기를 그린
'엄마의 말뚝'이 그러하고,  전쟁통에 미군 px에 근무하며 가장 노릇을 했던 시절의 경험이 담겨 있는'나목'이 그러하고, 외아들을 잃고 쓴 일기인 '한 말씀만 하소서'등이 그러하다.
그밖에도 그녀의 작품 곳곳에는 작가가 살아왔던 시대상황과 개인적 경험이 자연스레
녹아 작품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데 이번 산문집에서는 작가가 세상을 보는 눈이 더욱
부드러워지고 따스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책을 읽어내려 가다가 "익은 과일이 떨어지듯이 혹은 누군가가 거두듯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죽고 싶다"란 문장을 읽고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그러고 보니 "삶을 무사히 다해 간다는
안도감"이나 딸에게 "엄마가 살짝 노망이 들어 괴발개발 되지 않는 글을 쓰게 된다면 그것은 사회적인 노망이 될테니 그지경까지 가지 않게 말려 달라" 는 부탁까지 마음에 걸리는
문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일흔 일곱이라는 박완서님의 나이보다 2년전 "그 남자네 집"이란 박완서님의 첫사랑을 그린 소설에서 보여준 상큼한 감각이 살아있는 젊은 박완서님만을 기억하고 싶어 했나보다. 나는 박완서님의 담백하고 소박한 문체를 좋아할 뿐만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꾸밈없고 솔직하고 겸손한 품성을 존경한다.
해서 언제까지나 박완서님이 작은 마당에서 호미질 하며 꽃과 나무의 출석부를 부르시며
책의 표지 사진처럼 밝은 웃음을 지으시며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시길 진심으로 바란다.

 

[칠십 년은 끔찍하게 긴 세월이다.
그러나 건져올릴 수 있는 장면이 고작 반나절 동안에
대여섯 번도 더 연속상연하고도 시간이 남아도는 분량밖에 안 되다니.
눈물이 날 것 같은 허망감을 시냇물 소리가 다독거려준다.
그 물소리는 마치 모든 건 다 지나간다,
모든 건 다 지나가게 돼 있다, 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들린다.
그 무심한 듯 명랑한 속삭임은 어떤 종교의 경전이나
성직자의 설교보다도 더 깊은 위안과 평화를 준다.]


―본문 중에서

 

 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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