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배경은 현재가 아닙니다. 가상의 미래가 배경입니다.

결혼은 당연히 아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 내 신체조건 때문에, 그리고 경찰이라는 직업 때문에 나는 누구에게도 결혼하자는 말을 할 입장이 못 되었다.

내가 나의 없어진 성기능에 대해 솔직히 말하자 그녀는 괜찮다고 했다.

아내가 했던 말은 이런 것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평온한 상태이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서 평온한 상태가 된다면 그걸로 좋다.”
그리고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내 신체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한 이후로 결혼생활 내내 부부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꺼낸 적조차 없다.

결혼할 때 우리는 “남부럽지 않게 살아보자.”라고 서로 다짐했다. 이 말처럼 흔하고 상투적이면서도 복잡한 뜻을 담은 말이 또 있을까?  

 

아내와 다방에서 만나 결혼식은 생략하고 단골 생맥주집에서 술과 골뱅이무침을 먹으며 축하했다. 단둘이서. 우리는 간간히 웃고 떠들기도 했다. 아내는 골뱅이무침이 매워서 숨을 들이마시면서도 맛있다며 계속 먹다 배가 아프다고 했다.  

혼인신고만 했다. 뭔지 모르게 약간 장래가 불안하기도 했지만, 한 편으론 맥주집의 실내에 걸려 있는 독일의 잔치풍경을 보고서 우리가 독일과 어떤 인연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들떠 있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새로운 인생에 대한 설렘 같은 것이었으리라. 아내와 결혼한 날 둘이 같이 맥주를 마시던 그 때가 가장 행복했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이 그녀에게 그다지 마음의 평온을 가져다주진 못했던 것 같다. 몇 달이 지나자 양극성 우울증과 강박신경증은 다시 조금씩 심해졌고 여전히 항우울제와 기분안정제 같은 약물들을 복용하고 있었다. 본인은 행복하다고 말했지만.

겨울철이 되어 해가 짧아지면 우울함이 심해지는 경향이 있었고 환절기가 되면 또 영향을 받았다. 주기가 있었다고 하면 옳은 표현일까?
몇 가지 일을 의식을 치르듯 확인하는 버릇은 변함이 없었으며, 그녀는 증세가 호전된다기보다 단지 자신의 증세에 더 익숙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그녀의 증상을 이해하고 그녀가 얼마나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지 이해하더라도 이해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조금만 도움이 될 뿐이었다. 

우울한 상태로 있을 때는, 대개 저녁 8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기분이 좋을 때는 밤 12시까지 깨어 있을 때도 있었지만.
어쩌다 기분이 안 좋거나 한 차례 말다툼을 하다가 울고 난 후엔 꼭 잠을 잤다.

항상 아내에게서 후춧가루 냄새가 났다. 화장실에 가기가 귀찮을 때 애용하는 월세방 부엌의 시멘트 바닥에 뚫린 수챗구멍에서도 그 냄새가 났다. 우울할 땐 속옷을 일주일에 한 번 갈아입는 듯했고 그래서 냄새가 더 심했다.
그 냄새의 출처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그건 바로 아내가 복용하던 기분안정제인 ‘리튬’(Lithium Carbonate)의 냄새였다. 알약에서도 그 냄새가 났다.

회색빛. 잠을 자고 있을 때나 깨어있을 때나 그녀는 항상 회색빛 아우라에 싸여 있었다. 기분이 밝을 때는 영화, 노래에도 관심을 보이고 그녀 자신의 기호가 있었지만 우울할 때는 아무 영화도, 음악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증세가 호전되면 여러 가지 불평도 하고 잔소리도 했지만 우울할 때는 불평이나 잔소리가 없었다. 사소한 일에는. 반대로 조증 상태에서 기분이 들떴을 때는 수다스런 익살꾼이 되었는데 내가 제일 싫어하던 아내의 모습이었다.

아내는 기분이 들뜬 상태일 땐 잠도 줄어들었다. 이틀 동안 잠을 거의 자지 않았던 적도 있다. 그러나 겨울이 되어 해가 짧아지면 보통 우울해지고 잠도 늘었다. 본인은 밤이 좋다고 말하곤 했지만. 그런 그녀를 보고 나는 저녁 8시에 잠자리에 들곤 했던 내 어머니를 떠올렸었다.

어릴 적에 어머니는 나를 떠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어머니는 우울증이 있었고 삶은 힘들었으며 남편이 없이 생계는 이틀 앞이 막막했다. 초라하고 고단한 삶에 대한 그녀의 유일한 피난처는 꿈이었다. 잠은 그녀에게 남루한 현실을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향하는 출구인 듯했다. 어머니는 저녁 8시부터 잤다. 때로는 8시부터 세수를 하고 이를 닦는 등 취침준비를 하고 9시부터 잤다.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면 잠시 멍한 채로 자신의 현실을 다시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의식은 얼굴 뒤로 10미터는 물러나 앉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은 지금까지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아내는 어머니가 아니다. 아내는 나와 약속을 했으며 한 달만 있으면 내가 출소할 예정이었다는 사실도 변함이 없다. 자살했다곤 도저히 믿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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