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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소문과 영원의 말
나인경 지음 / 허블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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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소문과 영원의 말》은 기억을 잃은 채 살아가는 여자 안과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기 위해 고통받는 남자 정한의 이야기다. 이들은 과거 ‘블루진 프로젝트’라는 생체 실험의 피해자이자 서로를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이유 없이 서로를 그리워하는 연인이다. 기억이 사라졌는데도 그리움이 남는다면, 그 감정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이 소설은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하지만 우리가 이미 반쯤 들어와 있는 현실처럼 느껴진다. 클라우드, AI 같은 기술에서 기억 보조 장치만 제거하면 곧 오늘이 된다. 그렇기에 더 불편하고 더 두렵다. 읽는 내내 마음에 남는 질문은 ‘내가 나이기 위해 꼭 필요한 기억은 무엇일까’였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이름, 손을 잡은 온기, 함께 웃었던 기억. 그것들을 지워도 나는 여전히 나일 수 있을까?

안과 정한은 기억을 다루는 실험의 피해자이자 감정의 저항자다. 서로를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끊임없이 서로를 향한다. 기억 없이도 누군가를 그리워할 수 있다는 설정은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읽고 나면 묘하게 설득된다. 감정은 기억보다 오래 남고, 기억이 사라진 자리에도 감정은 남는다. 이 책은 그 사실을 차분하고 섬세하게 보여 준다.

《도시의 소문과 영원의 말》은 기억과 감정을 통해 자아와 존재를 되묻는다. 잊지 않으려 애쓰는 이름, 너무 아파서 지우고 싶었던 장면, 아무렇지 않게 떠오르는 얼굴들. 그 모든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든다. 그렇다면 나를 이루는 기억을 일부러 지운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더 편해지기 위해 감정을 없앤다는 건 진짜 자유일까.

책을 덮고 나면 막연한 따뜻함과 쓸쓸함이 동시에 남는다. 기억은 단지 데이터가 아니라 마음의 구조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기술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결국 사람은 마음으로 움직이는 존재임을 조용히 증명한다.

“과거, 그러니까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기억이 없는 AI는 매 순간 다른 말을 해대죠.” -p.70

이 문장은 단순히 AI에 대한 이야기로 보이지만 실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기억 없는 AI가 일관성을 잃듯 감정 없는 기억으로 살아가는 인간도 결국 스스로 무너진다. 우리가 매일 나눠 온 대화, 지켜 온 관계, 쌓아 온 감정은 모두 기억이라는 재료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이 문장은 날카롭게 짚어낸다. 사랑은 그래서 단지 기분이 아니라 정체성이다. 잊었는데도 그리운 것은 그래서 가능하다.


*출판사 허블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도시의소문과영원의말 #나인경 #허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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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먹는 남자
정해연 지음 / 엘릭시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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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죽음을 보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단 하나 ‘먹는 것’

주인공 제영은 음식을 섭취하는 순간 얼굴을 아는 사람의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 그것도 평온한 죽음이 아닌 잔혹하고 폭력적인 죽음. 그는 음식을 멀리하고 물만 마시며 살아간다. 고립된 삶 스스로를 지우는 방식으로 죽음을 피하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간호사 ‘솔지’가 그의 삶에 스며든다. 오랜만에 누군가와 연결되며 삶의 균형이 흔들리기 시작하지만 죽음을 향한 예지력은 멈추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본래 죽을 운명이었던 이가 살아남고, 다른 누군가가 대신 죽는다. 죽음이 ‘이동’하고 있다. 누군가가 죽음을 ‘거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엔 ‘중개인’이 있다. 돈을 받고 누군가의 죽음을 대신 맞을 사람을 사고파는 자

제영은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죽음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그저 방관자인가?

《못 먹는 남자》는 《홍학의 자리》 이후, 정해연 작가가 다시 보여주는 설정 스릴러의 진수다.

음식을 먹을 때만 죽음이 보인다는 설정, 얼굴을 알아야만 죽음을 볼 수 있다는 룰, 생의 운명은 바꿀 수 있어도 사의 운명은 바꿀 수 없다는 냉혹한 원칙. 제영의 능력은 결코 축복이 아니며, 예지도 아니다. 고문에 가까운 능력이다. 그는 세상과의 접촉을 피하고 의도적으로 ‘아는 얼굴’을 늘리지 않으며 살아간다.

그에 반해 중개인은 이 능력을 정반대 방향으로 활용한다. 죽음을 사유화하고 목숨에 값을 매긴다.

희망이 아니라 거래. 존엄이 아니라 가격
이 지점에서 질문이 시작된다.
정말 괴물은 죽음을 보는 자일까, 아니면 죽음을 정가에 매긴 자일까?

《못 먹는 남자》는 장르적 재미와 사회적 메시지를 동시에 붙잡는다.
죽음의 예지라는 소재를 통해 관계의 고립, 인간 존엄, 선택과 책임의 무게를 치밀하게 풀어낸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독자는 이렇게 묻게 된다.

“나는, 그 능력이 있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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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나의 우리 사람 열린책들 세계문학 294
그레이엄 그린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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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나의 우리 사람》은 쿠바 아바나의 진공청소기 외판원 워몰드가 주인공이다. 늘 돈에 쪼들리던 그는, 어느 날 영국 정보국 요원으로부터 “이 도시에 우리 사람이 필요하다”는 제안을 받는다. 처음엔 거절하려 하지만, 딸 밀리가 승마를 배우고 싶다며 컨트리클럽 가입을 요구하는 순간, 그는 스파이가 되기로 결심한다. 문제는, 그가 보내는 첩보가 모두 ‘가짜’라는 사실이다.

신문 기사에서 본 이름들, 진공청소기 설계도를 ‘무기 배치도’로 둔갑시킨 보고서가 본국에 도착하자 놀랍게도 모두가 그걸 믿기 시작한다. 실제로 전쟁을 막을지 모른다는 기대까지 받으며 그는 점점 깊숙이 빠져든다. 가짜 스파이의 진짜 활약(?)은 과연 어디까지 가능한 걸까?

《아바나의 우리 사람》은 전형적인 첩보물의 틀을 빌려, 국가·권위·애국·서열·냉전 이데올로기 등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을 하나하나 조롱하고 해체한다. 진지한 얼굴로 진공청소기 설계도를 분석하고, 존재하지 않는 요원을 감시하고 암살하는 세계. 모두가 진심이지만, 그 진심이야말로 부조리다. 우리가 믿는 체계는 사실 가짜 보고서 하나에도 무너질 만큼 허술하다.

워몰드는 ‘애국심’ 대신 ‘생활비’를 택했다. 그의 이 고백 “저는 돈이 필요했습니다”는 모든 첩보소설의 성스러운 명분을 허문다. 그 순간 그는 비로소 평안해진다. 국가를 위한 숭고한 희생이 아니라 삶을 위한 선택.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더 자주 직면하는 현실이다.

《아바나의 우리 사람》은 스파이라는 환상을 깨는 풍자극이자, 동시에 ‘그럴듯한 이야기’에 기대 살아가는 우리 사회에 던지는 냉소적 질문이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자주 진짜보다 그럴듯한 것에 안도하고 있는가?

#아바나의우리사람 #그레이엄그린 #열린책들
#우주서평단 #우주클럽_문학방

* 열린책들 도서 지원으로 우주클럽 @woojoos_story 에서 함께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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