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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 - 우국·한여름의 죽음 외 22편 ㅣ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4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11월
평점 :
🕵️ 평온한 여름 휴가지에서 벌어진 비극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한순간에 가족을 잃은 생존자에게 남겨진 것은 견딜 수 없는 슬픔이 아니라 어처구니없게도 다시 찾아오는 허기와 권태였다. 또 다른 이야기 속 젊은 장교 부부는 다가올 죽음을 앞두고 생의 가장 뜨거운 밤을 보낸다.
이 책은 미시마 유키오라는 작가의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강렬한 단편들을 묶은 결정적 기록이다. ‘꽃이 한창인 숲’의 몽환적인 아름다움부터 ‘한여름의 죽음’의 서늘한 심리 묘사, 그리고 ‘우국’의 충격적인 결말까지. 독자는 이 책을 통해 한 작가가 탐닉했던 아름다움이 어떻게 파멸과 맞닿아 있는지 그 위험한 궤적을 목격하게 된다. 과연 그가 문장으로 쌓아 올린 금지된 아름다움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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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시마 유키오는 문학적으로는 찬사를, 사상적으로는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양가적인 인물이다. 이 단편집은 작가의 생애 전반을 관통하는 미의식을 엿볼 수 있으며 그의 위험한 매력이 가장 농밀하게 압축된 증거물이라 할 수 있다. 수록된 24편 중 특히 주목해야 할 세 작품은 각기 다른 시선으로 '죽음'을 해부한다.
먼저 '꽃이 한창인 숲'은 미시마 문학의 원형을 보여준다. 동경과 과거 그리고 죽음의 이미지가 화려한 수사 뒤에 숨어 있다. 서사보다는 정서와 분위기가 압도적인 이 작품에서 그는 이미 태생적으로 죽음에 매혹된 자의 내면을 고백한다. 이는 10대 소년의 치기 어린 습작이 아니다. 현실의 전쟁이나 소란스러움에서 등을 돌리고 오로지 내면의 미적 완성을 추구했던 그의 탐미주의가 가장 순수한 형태로 드러난 문학적 선언문이다.
반면 '한여름의 죽음'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심리적이다. 작가는 생때같은 자식과 시누이를 잃은 주인공 도모코를 통해 인간의 이기심과 망각을 잔인할 정도로 냉정하게 포착한다. 슬픔조차 시간에 희석되고 마는 인간의 본성, 비극적인 사건 앞에서도 밥을 먹고 잠을 자며 살아가는 생존 본능에 대한 묘사는 어떤 공포 소설보다 서늘하다. 보들레르가 말한 "권태"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리고 미시마 유키오가 평생 경계했던 '평범하게 늙어가는 것'에 대한 공포가 이 작품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
가장 논쟁적인 작품 '우국'에서 작가의 탐미주의는 위험 수위를 넘나든다. 청년 장교의 할복이라는 정치적 소재를 가져왔지만 그가 천착한 것은 이념이 아닌 '죽음의 찰나에 완성되는 관능'이다. 피와 죽음을 가장 성스럽고 아름다운 것으로 포장하는 그의 문장은 불온하지만 부정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흡인력을 지닌다. 현대적 윤리관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전체주의적 광기와 죽음 찬양이 담겨 있지만 미시마 유키오라는 작가는 그 광기마저도 숨 막히도록 정교한 문장으로 포장하여 독자를 설득한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육체를 파괴한다는 이 위험한 미학은 미시마 문학의 정점이자 심연이다.
이 책은 독자에게 도덕적 판단과 미적 체험 사이의 위태로운 줄타기를 강요한다. 그러나 그의 문학이 지닌 파괴적인 힘을 확인하고 싶다면 반드시 거쳐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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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에는 지팡이 따위 드는 일도 없으면서 무심코 들고 온 그것은 먼 옛날에 기껏해야 일이 초쯤이나 만져보게 해주던 가보 투구의 감촉 같은 걸 문득 떠올리게 할 것이다. 바로 그런 때의 일이다." - <꽃이 한창인 숲> 중
현실에서 문득 나도 모르게 조상의 습관을 따라 하고 있을 때가 있다. 작가는 이런 순간을 문학적으로 아름답게 포착하며 우리 모두 조상으로부터 뿌리내려온 존재임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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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토록 큰 불행을 겪었는데도 미쳐버리지 않은 데 대한 절망감, 아직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데 대한 절망감, 인간의 신경의 강인함에 대한 절망감, 그런 것들을 도모코는 속속들이 맛보았다." - <한여름의 죽음> 중
비극마저도 일상으로 만들어버리는 인간의 망각에 대한 절망감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인간이란 어떠한 시련도 결국 견디고 일어나 일상을 회복하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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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고는 한참 화장에 시간을 썼다. (중략) 뒤에 남겨지는 세상을 위한 것으로, 그녀의 화장 솔에는 장대한 뜻이 담겨 있었다." - <우국> 중
순간의 행복을 영원히 박제하기 위해 스스로 파멸을 택한다는 광기 어린 논리다. 이것은 사랑의 완성인가 아니면 자기파괴의 미화인가. 죽음 직전의 화장이라는 행위에서 기이한 비장미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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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시마 유키오가 그리는 ‘죽음’은 단순한 생의 끝이 아니라 미적 완성의 도구로 보인다. 이러한 ‘죽음의 미학’을 현대의 독자는 윤리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한여름의 죽음’에서 보여주는 인간의 망각(슬픔의 풍화)은 비정한 것인가, 아니면 살아남기 위한 본능적인 방어기제인가?
🔦 작가의 위험한 사상(극우, 군국주의)과 그의 문학적 성취(유려한 문체, 심리 묘사)를 분리해서 평가하는 것이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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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현대문학으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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