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냐 > 환상이 허망함과 환멸로 변하지 않도록....
성에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지독하다. 집요하다. 어느 한 곳에서도 빈틈이나, 느슨함을 허용치 않았다. 그의 문제의식과 탄탄한 서사는 첫 장에서 출발해, 마지막 장까지 한번도 길을 잃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정해진 곳을 향해 치달아간다...”

존경하는 C선배의 리뷰. 모든 언론이 이 작품을 놓고 떠들었지만, 이게 핵심이 아닌가 싶다. 빈틈없이 끝을 향해 치닫는 작가의 필력에 숨쉴 겨를조차 없다.


...“내가 그렇게 잘난 척을 했어?”

세중은 한때의 객기라는 듯 민망한 웃음을 지었지만 연희는 등줄기로 소름이 지나갔다...(24쪽) 되풀이해 돌려온 추억의 필름이건만 상대방은 너무 사소해 기억조차 못하는 일. 사는게 그렇지 않은가. 혼자 만들어내는 환상이 삶의 힘이 되고, 족쇄가 되기도 하지만, 결국 무의미한 경우.


환상과 현실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된다. 연희는 ‘옛사랑’ 세중을 12년만에 만난다. 책은 12년전 미스테리로 안내한다. 각자 임자있는 처녀 총각으로 만나 갑자기 떠난 짧은 여행. 하지만 기이한 힘에 이끌린 듯 산속의 외가를 찾아간 그들은 폭설에 갖힌다. 모든 일상과 단절된 그곳에서 발견한 3구의 시체. 죽음은 인간의 존재와 환상의 끝 지점이다. 날카로운 불안과 공포로 시작된 섹스는 가학과 피학을 거쳐 연민과 생존본능으로 제 모습을 바꾼다.


교차편집되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3구의 시체다. 세계일주를 꿈꾸는 탈북 귀순자 남자, 일확천금과 스위트홈을 찾는 사내, 그리고 일처다부제의 사랑을 베풀던 ‘산의 여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싶지만 죽은 사람이 뭔 말을 전하랴. 작가는 참나무와 박새, 청설모, 그리고 바람의 입을 빌린다. 동물과 무생물의 목소리가 어찌나 생생한지. 이 작품의 장점을 극대화하는게 이들의 나레이션이다. 인간의 짝짓기, 자연과 어울리듯 저항하는 인간들의 무자비함과 어리석음.


12년만에 만나 아무렇지 않게 밥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싶을때...세중은 연희의 손을 끌어당겨 온몸으로 연희를 안았다. “나 보고싶지 않았어?” 소설 그대로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머리카락 쪽으로 불어오는 뜨거운 숨결’이 마치 직접 느껴지듯 당혹스럽고 떨렸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때도 그랬지만, 나는 김형경의 작품에는 도대체 숨도 못쉬고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 ^^;;;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겠지만, 이렇게 푹 빠질 수 있는 작가의 존재 자체에 때로 고마울 정도다..)


스토리는 너무나 탄탄하고, 그 깊이는 나를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환상을 벗어나는 바로 그 지점에 고통의 현실이 기다리고, 비굴하거나 모멸스럽지 않고는 도대체 살아갈 방도가 없어 보이지만......그 모든 것이 환상임을 알고 있고, 혼자 키워온 환상의 실체를 직면했음에도 내면에 살아 있는 환상, 스스로 작동하는 환상, 싹을 틔우고 뿌리 내리는 환상은 그대로...아니겠는가.(360쪽)

 

환상을 현실에서 확인하려다 부딪칠 허망함과 환멸...그럼에도 환상을 현실에서 잡아보려는 그 강렬한 유혹이 계속되겠지. 그리고 모처럼 이런 작품을 만나 식은땀을 흘리고 나면, 또 한동안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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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백산님의 "사랑한 후에도 오지 않는 것들"

동감입니다. 저 역시 숙제를 하듯 공지영의 소설을 읽고 허탈해하고 또 읽고 허탈해하고... 바보같은 짓을 계속합니다. 못된 버릇이 되버린 것 같습니다. 이 소설 역시 한겨레 신문 연재 시절 인쇄해서 차곡차곡 모아 보았던 것입니다. 어쩌나요? 버릴 수가 없는데.... 하나만 하렵니다. 책으로는 보지 않으렵니다. 얼마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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