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배‘는 어디서 왔을까? 현재로는 고대 바이킹족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당시 그들이 쓰던 잔은 대부분 뿔잔이었다. 아래쪽이 뾰족한 형태다 보니 잔을 세울 수 없었고, 잔을 채우면 늘 한 번에 다 마셔야 했다. 한마디로 ‘원샷‘이다. 또 잔을 부딪치는 풍습은 적들과 화친을 할 때, 술잔을 부딪쳐서 잔 속의 술을 서로 섞음으로써 독을 탔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 P17

유적으로 본다면 현재까지 와인의 발상지로 가장 유력한 지역은 조지아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와인 용기가 조지아의 코카서스 산맥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 남쪽의 유적에서 발견한 약 8,000년 전 항아리의 파편에서 포도를 발효해 만든 와인의 흔적이 드러난 것이다. - P23

가장 오래된 와인 기록은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바빌론 제국이 있었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다.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는 와인의 흔적이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문자로 직접 기록되었다. 기원전 3,000년경의 쐐기문자 Cuneiform script로 기록된 점토판에서다. 이것은 수메르 고대 도시인 우르의 유적에서 출토된 공예품이다. 자색석회암, 조개껍질, 청금석 모자이크가 박혀 있다. 왕과 가신들이 연회를 즐기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왕이 지금의 와인잔과 유사한 긴 잔을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P33

수많은 제후들은 수도원에 포도밭을 기증한다. 수도사는 기존의 수도원에서 나와 또 다른 지역에 수도원을 건립하고, 포도를 재배하며 와인을 제조했다. 이로 인해 포도재배와 농업기술도 확산되어 갔다. 기독교의 미사에서는 와인은 빠뜨릴 수 없었기에 샤를마뉴가 통치하던 시절에는 수도원에서의 와인 양조가 의무화되었다. 게다가 중세 시대 수도원은 순례자의 숙박 장소였다. 물론 가난한 사람이나 아픈 사람을 받아들이는 장소기도 했기에 그들을 환대하기 위해서도 와인이 필요했다. 수도원의 자급자족을 위해 샤를마뉴는 수도원에서 와인은 물론 맥주 양조도 의무화시킨다. 각 영주는 맥주 양조장을 각 장원에 설치해야만 했다. 이 조치로 와인보다 낮던 맥주의 지위가 향상되었다.  - P92

알고 보면 십자군 전쟁은 유럽에 증류주라는 문화를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스코틀랜드의 스카치 위스키, 동유럽의 보드카, 프랑스의 코냑 등은 모두 십자군 전쟁으로 증류 기술이 중동 지방에서 도입되며 생긴 것이다. 동양에서도 몽골을 통해 우리나라에는 소주가, 중국에도 고량주가 생겨나게 된다.  - P98

증류 기술은 그리스 철학인 사원소설에서 시작한다. 이는 만물의 근원이 물, 공기, 불, 흙으로 되어 있다고 본다. 엠페도클레스가 주장했으며, 앞서 이야기했듯이 히포크라테스가 활용하기도 했다. 여기에 온, 냉, 건, 습을 더하면 세상의 모든 물질이 바뀐다고 집대성한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다. - P98

하지만 이 사상은 유럽이 인본주의에서 신본주의 사상으로 바뀌면서 하락세가 된다. 흔히 이야기하는 중세 암흑기다. 현실적, 사실적 그림보다는 신체을 나타내는 추상적인 예술 작품만 있었다. 만물의 본질을 나눈다는 점도 세상을 신이 만들었다는 신본주의와 맞지 않았다. 덕분에 사원소설은 유럽이 아닌 중동 지방에서 연금술로 발전하게 된다.  - P99

연금술 실험은 술에도 적용되었다. 와인이나 맥주와 같은 발효주에 열을 가해본 것이다. 열을 가하다가 물보다 알코올이 먼저 기화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은 100도에서 끓지만, 알코올(에탄올)은 78.3도에서 끓는다. 먼저 기화된 알코올은 상승하게 되지만, 이내 찬 성질을 만나면 다시 액체로 바뀐다. 이것이 바로 술의 증류다. 영어로는 스피릿 Spirits 이라고 한다. 발효주의 영혼(알코올)만 뽑아냈다는 뜻이다. 서양에서는 십자군 전쟁 전후로 연금술을 받아들여 위스키, 코냑, 보드카 등의 증류주가 발달할 수 있었다. 기술이 아닌 생각과 철학이 새로운 물질을 발견하게 한 것이다. - P100

유럽의 모든 증류주는 어원을 같이 한다. 바로 북유럽의 아쿠아비트 Aquavit, 위스키의 어원인 우스게 바하 Uisce beatha, 프랑스의 오드비 Eau-de-Vie, 동유럽(폴란드와 러시아가 원조)의 보드카 지즈데냐 바다 등이다. 이는 ‘생명의 물‘이라는 뜻이다. 증류주가 중세 시대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페스트)의 치료제로 쓰였기 때문이다. - P101

종교인들이 흑사병으로 죽는 것을 본 사람들은 더 이상 종교에만 의지하면 안 된다는 회의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인본주의 사상이 싹트고 르네상스의 기반이 마련되는 계기다. - P103

14세기 영국은 11세기 프랑스 산하의 노르망디 공국 점령으로 프랑스어를 성직자·왕실의 언어로 사용했었다. 하지만 흑사병으로 다수의 성직자들이 사망하여 이는 영어가 영국의 국어가 되는 계기가 된다. 당시 베네치아에서는 외부에서 온 배는 40일간 부두에 정박해 있어야 했는데, 이탈리아어의 ‘40‘을 뜻하는 ‘Quaranta‘에서 검역 Quarantine 이라는 단어가 생기기도 했다.  - P104

폴란드는 흑사병의 피해가 비교적 적었다. 폴란드에는 독특한 문화가 있었는데, 증류주로 겨드랑이, 발, 손 등 몸을 소독하는 것이었다. 몸뿐만 아니라 집의 식기나 가구 등 모두의 손이 자주 닿는 곳을 소독했다. 그리고 도시 위주로 발달한 서유럽과 달리 폴란드에는 야생림이 많아 인구 밀도가 낮았고, 흑사병의 원인인 쥐를 잡아먹을 수 있는 늑대 등의 맹금류가 많았기 때문이다. - P104

당시 유대인은 흑사병 희생자가 적은 편이었다. 이를 이유로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소문이 퍼져 버리는 바람에 유대인 박해와 학살이 일어났다. 유대인의 피해가 적었던 것은 미츠바 Mitzvoth 라는 엄격한 규율이 있었기에 중세 기독교인보다 위생적이었고, 일반 기독교인과격리된 곳에서 생활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 P104

이슬람 문화권에서 금주를 하게 된 계기는 바로 이슬람교를 창시한 무함마드 때문이다. 그는 술로 인한 폐해가 생기자 아예 금지해 버린다. - P106

그렇다면 이슬람에서는 술 대신 뭘 마셨을까? 바로 커피다. 커피는 정신을 차리게 하고, 예배를 잘드릴 수 있게 도와 줬기 때문이다. 지금의 커피 마시는 방법을 일반화시킨 것도 이슬람 신비주의라고 불리는 수피즘이었다.  - P107

네덜란드인이 예멘에서 커피나무를 몰래 가져와 자바섬, 실론섬에 심은 것이 자바커피, 실론티 등의 유래가 되기도 한다. - P108

음주의 허용 기준은 나라마다 다르다. 튀니지나 튀르키예는 야외 카페에서도 상당히 자유롭게 마시는 편이며, 의외로 이란도 집에서는 술을 마시는 편이다. 원칙적으로는 금지이긴 하지만, 1979년까지 편하게 마시던 나라였기 때문에 그 영향이 남은 것으로 보인다.
엄격한 금주로 유명한 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다. 일반 국민은 당연하고, 외국인도 마시면 안 된다. 심지어 의술용으로도 잘 사용하지 않는다.  - P108

중세 유럽 역사에는 유명한 전쟁 2개가 있다. 하나는 교황과 유럽 제후들의 이권이 맞아 떨어져 침략 전쟁으로 전락한 십자군 전쟁이며, 다른 하나는 유럽의 패권을 노리던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 전쟁 (1337~1453)이다. 백년전쟁 이전의 유럽은 국가와 민족이 아닌 성직자, 귀족, 왕족으로 계층이 나뉘었다. 백년 전쟁 이후 영주의 힘이 강했던 봉건주의가 무너지고 영국과 프랑스에 국가와 민족이라는 개념이 생긴다. 근대 국가의 기틀이 마련되는 시기였다.
- P109

소와 돼지를 농업의 본질로 본 농민들은 ‘Cow‘와 Pig‘라는 단어를 썼고, 먹는 데 중점을 둔 귀족은 ‘Beef‘나 ‘Pork‘라는단어를 썼다. 당시만 하더라도 농민들은 소나 돼지를 먹을 일이 지극히 적었기 때문이다.  - P110

보르도 지역에 대한 분쟁은 백년 전쟁의 대표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서 생산되는 와인은 잉글랜드인의 밥줄이었고, 무엇보다걷어들이는 세금 역시 당시 잉글랜드 왕국 재정의 어마어마한 부분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 P110

결국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는 술을 놓고 116년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게 된다. 이렇게 되면서 사과 발효주 사이더 Cider로 유명한 노르망디, 샴페인으로 유명한 샹파뉴 Champagne, 브랜디로 유명한 아르마냑 Armagnac, 고급와인으로 유명한 부르고뉴 지역까지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지금으로 보면 백년 전쟁은 술 주산지들의 전쟁이었던 셈이다. 전쟁이 끝나고 프랑스는 술의 지방이라는 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된다. - P111

보르도인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탈환하려 노력한 탤버트 장군을 기리기로 한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딴 와인을 만드는데, 그것이 샤토 딸보 Chateau Talbot다. 보르도 최고급으로 꼽히는 그랑크뤼 4등급에 속하는 와인이다. - P121

이처럼 지금 보르도 와인은 백년 전쟁의 전후 영국에서의 소비, 네덜란드인으로 시작한 간척 사업, 마케팅 기법, 그리고 프랑스의 재배 환경이 더해서 만들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배경을 알고 나면 와인을 단순한 프랑스의 전유물이라고 보기 어렵다. - P124

주식회사, 나아가 증권거래소 등을 만든 나라가 바로 네덜란드다.네덜란드가 주식회사를 만든 계기는 간단하다. 네덜란드 역사에서 늘 등장하는 청어 사업 덕분이었다. 원래 이 청어는 주로 발트해에 서식하면서 한자 동맹의 번영을 이끌었다. 하지만 회유성 어종인 청어는 서식지를 북해로 바꾸게 된다. 그러면서 발트해의 한자동맹은 기세가 꺾이고 청어라는 수혜를 얻은 네덜란드가 떠오르게된다. 네덜란드는 청어로 자본을 축적한 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까지 한다. 물고기 하나가 역사를 바꾼 것이다. 16세기 네덜란드 인구는 약 100만 명인데, 그중 30만 명이 청어잡이에 종사할 정도였다.
청어로 자본이 생긴 네덜란드는 대항해 시대에 맞춰 스페인, 영국과 신대륙 진출 경쟁을 해야 했다. 그래서 거대한 자본이 있는 회사가 필요했던 이들은 네덜란드의 선박 회사들을 합병시킨다. 그리고 각각의 선주가 투자한 만큼 지분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모인 자본으로 근대 최초의 주식회사인 동인도 회사를 세우게 된다. 이후 자금줄을 대는 중앙은행, 주식을 가지고 거래를 할 수 있는 증권거래소가 차례차례 세워진다. - P125

네덜란드인은 좋은 와인은 좋은 와인대로 열심히 팔았다. 대표적으로 루아르 계곡의 와인과 보르도 와인이다. 고가의 와인은 그대로 팔되, 품질이 낮은 와인만 증류주로 팔았다. 이른바 투 트랙 전략이었다. 그리고 코냑은 그대로 영국으로 수출되었다. 당시 영국은 위스키 산업이 확산되지 않아 세계 최고의 코냑 소비처이기도 했다. - P128

독일이 맥주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세계 최초의 식품위생법인 맥주 순수령 Reinheitsgebot 을 발포했기 때문이다.
1516년, 독일의 바이에른 공국에서는 맥주는 보리(보리 맥아), 물, 홉으로만 만들어야 한다는 법령을 공포했다. 독일 국민은 이 법령을 존중하며, 자국의 자랑스러운 문화로 만들어가고 있다. 독일에는 맥주 종류가 6,000개 이상이며, 각각의 작은 양조장이 각자의 문화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  - P132

맥주순수령이 공포된 대표적인 이유는 맥주의 품질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홉 이외에도 중독, 환각 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식물성 재료(그루트)를 넣는 경우도 있어, 마신 사람이 죽거나 병에 걸렸다. 흡은 환각이나 중독 작용은 당연히 없고, 다양한 풍미가 있었으며 살균 작용을 해서 맥주의 품질 유지에 도움을 줬기에 대체 원료로 뽑혔다.
사실 다른 이유가 더 있긴 했다. 첫째, 당시 그루트Gruit라는 식물성 재료의 전매권을 가진 교회와 영주라는 기득권층이 있었다. 그들은 이것을 독점하여 부와 권력을 유지하려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루트를 홉으로 바꾼 것은 기득권 싸움이라는 해석도 있다. 
둘째, 맥주 순수령 이전에는 밀과 호밀로도 맥주를 많이 만들었는데, 이로 인해 밀과 호밀의 가격이 많이 올랐다. 주식인 밀 가격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제빵업계와 양조장간의 갈등을 무마하기 위함도 있었다. 결국 제빵은 밀이나 호밀로,
맥주는 보리로 만들기로 했다. 
셋째, 귀족들의 이득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당시 보리의 전매권은 바이에른 공국의 귀족들이 가지고 있었다. 맥주의 원료로 보리가 선택된 배경에는 그들의 배를 채우기 위한 것도 있었다. - P133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맥주 순수령은 법률로써의 기능을 잃는다. 당시 유럽공동체(EC) 가맹국들이 독일만 맥주의 원료를 한정한다는 것은 비관세 장벽이 있다는 주장을하여 의회로 제소가 된다. 이에 주장이 받아들여지면서, 1987년 순수령은 비합법화로 전환된다. 맥주 순수령은 법률로써의 기능은 잃고 문화적 상징으로 남게된다. 다만 독일의 양조장들은 여전히 이 순수령을 따르는 곳이 많다. - P135

스페인에는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독특한 와인이 하나 있다. 바로서양의 와인과 이슬람의 연금술에서 유래한 증류주를 섞은 술,
셰리 와인 Sherry wine 이다. 셰리 와인이란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카디즈 지방의 주정 강화 와인이다. 카디즈 주변에서 생산되어 와인에 알코올을 강화하여 산패를 방지하고, 유통기한을 늘린 와인이다. 포르투갈의 포트 와인, 마데이라 와인과 더불어 3대 주정 강화 와인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 P141

샴페인이라는 단어는 프랑스의 샹파뉴 Champagne 지방을 영어식으로 부른 것이다. 원래는 샴페인 와인으로 불렸지만, 이 지역이 워낙 와인으로 유명해서 줄여서 샴페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축하할 일이 있을 때 이 샴페인으로 축포를 터트린다. 왜 그럴까? 샹파뉴 지방에서 초대 프랑스 왕(당시 프랑크 왕국) 클로비스가 세례를 받았으며, 이 자리에 세계 문화유산인 랭스 대성당이 세워진다. 이곳에서 30명이 넘는 프랑스 왕이 대관식을 치렀다. 이처럼 샹파뉴는 원래 지역 자체가 프랑스 왕국의 시작이며, 축배의 지역이었다. 축하할 때도 자연스럽게 이 지역의 와인이 사용되었다. 샴페인은 나폴레옹의 일화로도 연결된다. 당시 나폴레옹의 기마 병단은 전쟁에 나갈 때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샴페인의 입구를 깨 축포를 터트려 사기를 진작시켰다고 한다. 이 일화로 축포로 승리를 기원한다는 의미도 생겼다. - P146

앞서 이야기했듯 샴페인은 적포도로도 만든다. 적포도로 샴페인을 만들 때 주의해야 하는 것은 적포도의 색소가 나오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160kg의 포도에서 102L까지만 즙을 짜낼 수 있게 법률로 정해져 있다. 그 이상을 짜면 붉은 색소가 나온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레드 와인은 적포도와 포도 껍질을 발효하여 만드는 것이고, 껍질을 제거하면 화이트 와인도 만들 수 있다. 물론 일반적인 화이트와인은 당연히 청포도로 만든다. 그렇다면 적포도를 조금만 발효하면 어떻게 될까? 이러한 경우에는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의 중간이라고 불리는 로제 와인이 된다.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을 섞어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로제 와인은 적포도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로제 와인은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의 중간보다는 레드 와인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 P151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의 제조상의 가장 큰 차이라면 껍질의 발효 유무일 것이다. 레드 와인은 껍질을 넣고 그대로 발효하지만,
화이트 와인은 껍질을 제거하고 발효를 한다. 한마디로 포도 알맹이로만 발효를 하는 것이며, 포도 씨 또한 맛이 써지기 때문에 모두 제거한다. 화이트 와인을 이렇게 포도 알맹이 중심으로 만드는 이유는 포도 열매가 주는 신선하고 상큼한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맛은 생선의 비린내를 잘 잡아 준다. 마치 생선 요리에 레몬을 뿌리듯 말이다.
그렇다면 청포도로 화이트 와인을 만들되, 껍질까지 넣고 발효시키면 어떤 와인이 될까? 이렇게 만든 와인을 최근에는 오렌지 와인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된 이유는 와인 색이 오렌지빛깔을 띠기 때문이다. 청포도의 껍질이 발효하면서 진한 감귤 색을 내는 것이다. 오렌지 와인은 기존 화이트와인에 비해 맛이 묵직하고 떫다. 이는 발효된 껍질과 씨앗이 내는 맛이다. 그래서 화이트 와인 계열이지만, 육류와도 잘 어울린다.  - P152

술집의 발전은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한다. 다양한시각을 가진 민중끼리 서로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술집은 언제, 어떻게 발전하게 되었을까? 흑사병, 르네상스, 산업혁명은 술집의 발전도 이뤄냈다. 기록상 최초의 술집은 기원전 18세기,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 등장한다.  - P159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5세기부터 화폐 경제가 성장해 본격적으로 술집 문화가 번성하게 된다. 로마는 건국 초기 맥주 중심의 나라였으나 기원전 168년 그리스를 정복하면서 와인을 주로 마시는 나라로 바뀌었고, 한국의 주막과 유사한 숙박 시설이 함께 있는 타베르나 Taverna 라는 술집이 발전하게 된다.
술집 간판에는 그리스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표시를 달았다. 제공되는 메뉴는 지금과 비슷하다. 대두가 들어간 죽, 삶은 돼지고기,
돼지 머리 꼬치, 장어, 올리브, 소시지, 어묵, 닭고기, 야채 마리네,
치즈, 오믈렛 등이다. 참고로 로마인은 하루에 세 끼를 먹었는데, 점심을 가장 많이 먹었다. 로마 역시 농민이 많았고, 오후부터 가장 많은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 P160

프랑스혁명 이후 등장한 대표적인 술집은 ‘카페 Caffe‘와 ‘카바레 Cavare‘다. 카페 문화는 17세기 아랍에서 베네치아, 오스트리아를 거쳐 프랑스에 오게 되는데, 한국의 커피숍처럼 단순히 커피만을 판매하는 것이 아닌, 증류주에 허브를 넣은 리큐르 및 와인까지도 다양하게 제공이 되었다. 음악과 술, 사교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카바레 문화는 19세기에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이곳은 카페 하우스를 유흥과 감각의 공론장으로 재창조한 공간이었으며, 다양한 공연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진화했다. 대표적인 곳이 영화의 배경이 되기도 했던 물랑 루즈다. - P160

영국의 전통적인 술집이라면 아마도 펍 Pub 을 생각할 것이다.
다만 펍의 역사는 의외로 길지 않다. 오래된 술집 문화는 오히려 영국의 맥주, 에일 Ale 을 파는 에일 하우스 Ale house 다. 에일은 원주민이었던 켈트족이 고대 페니키아인으로부터 배워온 술이었고, 5세기경에 시작한 앵글로족과 색슨족의 이주, 11세기의 노르만족의 침공 등에도 그대로 유지된 술이기도 하다.  - P161

이곳의 주인은 술을 담당하는 여성이라는 의미로 ‘에일 와이프 Ale wife‘라고 불렸다. 우리말로 하면 주모다. 당시 맥주에는 지금의 홉이 아닌 다양한 허브가 들어갔는데, 때에 따라서는 환각 작용을 일으키거나 몸을 해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이유로 에일 와이프는 이상한 물질을 만드는 마녀라는 오해를 사게 된다. 당시의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남성에게 경계를 사게 했다는 분석도 있다.  - P162

흑사병이 본격적으로 유행한 14세기부터 에일 와이프는 마녀 이미지의 대명사가 된다. 당시 에일 와이프의 상징은 청소를 하기 위한 ‘빗자루‘, 장터 등에서 눈에 잘 띄기 위한 검은색의 ‘긴 모자‘,
그리고 곡식을 훔쳐먹는 쥐를 잡기 위한 ‘고양이‘였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마녀의 이미지는 여기서 왔다. - P162

이후 등장한 술집이 지금의 펍이다. 흑사병이 지나가고 안정을 찾아갈 때쯤 살아남은 농민과 노동자의 수입이 크게 올랐다. 일손이 부족해진 것이다. 원래 펍은 퍼블릭 하우스 Public House 라는 마을의 공적인 공간이었다. 수입이 많아진 노동자와 농민을 대상으로 다양한 주류를 판매하기 시작했고, 19세기에 들어서 주급 시스템이 갖춰지자 노동자들의 주말 휴식처가 되었다. - P162

독일의 술집은 유럽의 마지막 종교 전쟁이라는 30년 전쟁 때,
거대한 집회장이 되었다. 이곳은 넓은 공간으로 잡화, 식품, 은행 업무, 군인 집합 장소 등 시장과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술집이 장터고 장터가 술집이었다. 독일의 거대한 호프집 문화는 이때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 P164

금주법은 1920년부터 1933년까지 있었던 법으로, 알코올 제조 및 판매, 운반을 금지했던 법이다. 이 법은 밀주의 제작, 그로 인한 갱들의 난립, 늘어난 마약 소비로 결국 오래 버티지 못한다. 이후 ‘고귀한 경험 The Noble Experiment‘이라는 비꼬는 평가만 남긴 채 13년 10개월 7시간 32분 만에 사라져 버렸다. - P181

금주법이 시행되었다고 하지만 술의 소비는 쉽게 줄지 않았다.
1층에 있던 바는 지하로 숨으며 히든 바 등의 문화를 만들어 냈다.
여기서 팔던 술은 대부분 밀주였다. 제대로 된 숙성도, 발효도 없이 그저 알코올을 만들어 냈다. 그래서 냄새도 좋지 않았고, 비주얼도 빈약했다. 이런 시기에 본격적으로 발달한 것이 칵테일이다. 칵테일은 향기로운 과실향과 멋진 장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나만의 술을 즐길 수 있는 문화를 만들었다. 미국의 금주법은 수많은 미국의 바텐더를 유럽으로 보내는 계기가 되어 유럽의 바 문화보급에 큰 영향을 미쳤다. - P182

금주법의 배경에는 ‘알코올은 사탄의 음료‘라고 외치던 미국의 보수 기독교파의 영향도 있었지만, 독일에 대한 보복 조치도 있었다. 당시 미국의 맥주 산업을 이끌던 기업 대부분이 독일계였기때문이다.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전인 1916년도만 해도 이 금주법에 대해서는 정치가들 스스로가 크게 관여하려고 하지 않았다. 독일계 미국인의 표심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독일과 전쟁을 벌이면서 독일계 미국인은 점점 발언권이 사라진다. 독일계 미국인이 만드는 맥주에 대한 반발도 거세졌다. 결국 수많은 독일인이 그들의 아이덴티티를 숨기게 되었다. 뮐러 Miller는 밀러 Miller가 되었으며, 슈미츠Schmitz 는 스미스Smith 가 되었다.
당시 독일계 맥주 회사는 안호이저 부쉬 Anheuser-Busch, 쿠어즈Coors, 밀러 Miller, 슐리츠Schlitz 등이었다. 미국 내에서는 이들이 번 돈으로 독일을 지원했다는 의혹이 있었다.  - P183

미국의 대표 카레이싱 대회이자 세계 3대 자동차경주 대회인 나스카 NASCAR도 금주법에 의해 탄생됐다. 밀주를 싣고 나르는 차는 경찰의 추격을 쉽게 뿌리쳐야 했다. 하지만 무거운 술을 실은 차가 빨리 달리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배달용 차량의 무게를 최대한 가볍게 했고, 더욱 빨리 달릴 수 있도록 개조했다. 그 개조한 차로 밤에 마피아들끼리 시합을 했던 것이 지금의 나스카 대회로 자리 잡았다. - P184

일본 사케가 본격적으로 발전한 계기는 바로 1895년에 일어난 청일 전쟁에서의 승리였다. 일본은 승리한 배상금으로 술 산업의 근대화에 투자한다. 특히 술의 발효를 돕는 미생물학 관련 부분에 적극 투자했으며, 발효주인 일본 사케의 안정적인 생산 및 출하에 힘을 쓴다. 이렇게 힘을 쓴 이유는 당시 전체 세수의 33%를 주세가 차지했기 때문이다.  - P214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나눈다면, 주로 북쪽에서 소주를 많이 만들었고, 남쪽은 막걸리가 주류를 이뤘다. 이유는 간단했다. 북한 쪽은 쌀 재배량이 남쪽이 비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조와 수수로 막걸리를 만들었는데, 맛이 좋지 않았다. 그것에 비해 남한은 호남평야부터 곡창지대가 많았고, 좋은 술맛이 나는 쌀을 중심으로 한 막걸리가 발달하게 된 것이다. 당시 중공업은 북쪽이, 경공업은 남쪽이발달했는데, 이것은 일제가 중국 침략을 위해 많은 공장을 북쪽에세운 것에 근거한다. 소주 공장은 막걸리와 달리 자본집약적인 성격이 있는데, 그렇다 보니 북쪽에 발달을 하게 된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남한에 소주가 발달한 이유는 어찌보면 한국 전쟁이 계기였다. 해방 이후 북에는 공산 정권이 들어오다 보니 모든 것이 사회 경제 체제로 진행된다. 국가가 양조장을 운영하는 시스템이 되자 많은 소주 양조인들이 월남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소주 회사인 진로도 원래 평안도 용강의 회사였으며, 중요 무형문화재인 문배주를 만들었던 평양의 평천 양조장 역시 이때 월남한 것이다. 현대 한국 소주의 기원은 남쪽이라기보다는 북쪽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 P237

현대의 소주 양조장은 막걸리 양조장에 비하면 그 숫자가 매우 적다. 막걸리 양조장이 1,000여 개 정도 된다면, 소주 양조장(희석식소주 제조)은 10곳 정도이다. 이것은 1970년대 새마을 운동과 연관이 있다. 당시 슬로건 중 하나가 ‘빨리, 많이, 싸게‘라는 것이었는데, 소주 양조장이 여러 곳 있으면 세금 징수에 번거로운 일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시도별로 하나씩만 허용하고, 생산량의 50%를 그 지역에서 소비하게 했다. 그래서 1970년대 200여 개의 소주 양조장이 다 통폐합되어 버린다.
막걸리도 상황은 비슷했다. 막걸리 제조사 이름을 보면 합동 주조장이라고 되어있는 곳들이 있는데, 이러한 곳들이 당시 합병을 당한 곳들이다. 대표적인 곳이 장수 막걸리를 만드는 서울탁주제주협회 등이다. 당시 51개의 막걸리 양조장을 합친 곳이며, 생탁을 만드는 부산합동양조도 비슷한 개념이다. 다만 소주는 시도 단위에 1곳, 막걸리는 면 단위마다 1곳으로 정해져 막걸리가 훨씬 많이 남을 수있었다. 이렇게 양조장들이 통폐합되어 효율은 좋아졌을지 모르나, 한국 술의 다양성이 사라졌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 P238

지금의 일반적인 소주는 주정에 물을 탄 희석식 소주이지만 처음부터 다 이러한 소주는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희석식 소주가 생산된 것은 1965년도부터였다. 쌀, 보리 등 양곡으로 술을 빚지 말라는 양곡관리법이 발포되면서 이때 많은 증류식 소주 양조장이 희석식으로 모두 바뀌게 된다. 전통 소주가 아예 명맥을 잃게 된 것이다. - P238

소주의 도수 역시 예전과 지금은 많이 다르다. 1920년대 나온 소주는 알코올 도수가 35도였다. 1970년대 25도 정도로 낮아졌고최근에는 대부분 20도 이하다. 소주의 도수가 낮아진 이유는 소주도수가 높아서 화재가 났기 때문이었다. 지금과는 달리 열차에서 홉연이 가능했을 때, 깨진 소주병에 담뱃재가 떨어져 화재가 났던 것이다. 도수가 높아 마시고 사망하는 일도 정말 많았다. 그리고 음식과의 궁합 문제도 있었다. 우리나라처럼 음식과 증류주를 먹는 나라는 드물다. 도수가 너무 높으면 음식과 함께 먹기 불편하기에, 음식과 잘 맞으려면 발효주의 도수가 돼야 했다.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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