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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
박수용 지음 / 김영사 / 2011년 9월
평점 :
어릴 때 읽은 소년 소녀 세계 문학 전집 중에 위대한 왕이라는 소설이 있었다.
백두산 호랑이가 주인공인, 상당히 특이한 소재의 소설이었는데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젊은 시절 호랑이 사냥꾼이었던 노인이 산책 중 호랑이와 일대일로 조우하는 모습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며 붉은 석양이 산 전체를 물들일 때 그 태양을 등 지고 이마에 큰 대(大)자
가 분명한 거대한 호랑이가 마주 보고 서 있는 장면은 숨 쉬기 힘들 정도의 긴장감을 불러 왔다.
곰방대를 입에 문(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노인은 미동도 안하는 호랑이를 조용히 응시하며
쳐다 보고 호랑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참 서로를 마주하던 중 호랑이가 조용히 길을 비키고
노인이 계속 그 길을 따라 조용히 걸어 가던 모습은 말로 형언하기 힘든, 그렇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카리스마를 느끼게 했다. 그리고 이 장면은 이 책에서 그대로 언급된다.(깜짝 놀랐다!) 우연히 숲에서 쉬던 작가는 5~6미터 앞에 나타난 거대한 호랑이 앞에서 말 그대로 얼어 붙게 된다. 조용히 응시하던 호랑이는 아무 짓도 하지 않으면 안전하다는
무언의 경고를 날리듯이 천천히 다시 걸어가 버린다.작가분은 카메라를 들 생각도 못했다고 한다.
이 책은 평생 시베리아 호랑이 취재에 모든 걸 다 바친 한 피디분의 촬영 과정과 그 여정 속에서
느낀 깊은 사색의 내용을 적은, 그렇기에 대단히 밀도 높은 결과물이다. 이미 다큐로 유명하지만 다큐에서는 미처 나타내지 못한 개인의 생각과 촬영 과정의 고단함을 상세히 펼쳐낸다. 6개월 동안 여러 서식지를 다니며호랑이가 나타날만한 곳을 찾고 장소를 정하면 그곳에서 6개월 동안 한 평 남짓한 공간에서 숙식을해결하며 호랑이만 오기를 기다린다. 불을 피울 수도 없으니 찬 주먹밥을 따뜻한 물에 녹여 소금육포 김과 함께 하루 2끼를 해결하고 대소변도 모두 잠복지 내에서 해결한다. 심지어 양치질도못한다!!(물을 아껴야 하니까!!) 호랑이가 언제 나타날 지 알 수 없으니 늘 가수면 상태로 얕은 잠을자야 한다.영하 5~7도 정도의 토굴 안에서 이런 생활을 혼자 6개월이나 한다고 생각하면 차라리수감 생활이 훨씬 인간적이지 않을까 싶다.
이런 노력 덕분일까? 동물학자들도 평생 한 번 마주치기 힘들다는 시베리아 호랑이를
그렇게 많이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던 게 아닌가 한다.( 심지어 호랑이 일가족이 눈밭에서 뛰어
노는 진귀한 사진도 담겨 있다!) 다른 러시아 학자들은 카메라만 설치하고 나중에 와서 확인하는
정도인 반면 이 피디 분은 늘 기다리다가 호랑이가 나타나면 카메라 각도를 바꿔가며 찍었으니
그럴 수 밖에...물론 그 과정에서 호랑이 일가족이 잠복지를 부수는 위험천만한 사태까지 일어난다.(정면에서 그리고 위에서 호랑이들이 문과 지붕을 부수려고 날뛰면 대체 어떤 기분일까??)
그렇지만 이 책은 호랑이만을 다루지 않는다. 사슴, 멧돼지,표범 뿐 아니라 여러 식물과 연해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 방식 나아가 연해주 그 자체가 주인공이 아닌가 한다. 호랑이를 추적하려면 먹이감인 사슴이나 멧돼지의 습성을 알아야 하고 그들의 먹이감인 여러 식물에게 주의를 기울일 수 밖에 없다. 계절의 변화와 그에 따라 달라지는 여러 식물들의 상태 그리고 이에 의존하는 동물들의 이동 경로는 호랑이의 삶에도 당연히 영향을 주게 된다.그리고 이런 자연의 삶 속에 녹아들어 살아가는 주민들의 모습은 생태계의 일부로 녹아든 삶이 어떤 것 인가를 체감하게 한다. 단순한 미신으로 치부될 법한 행위 들에도 모두 의미가 있슴을, 그 하나하나가 자연에 대한 존중을 담고 있슴과 더불어 말이다.
그렇지만 천지불인(자연은 인자하지 않다)이라는 말처럼 약육강식의 세계와 근친상간(서식지의 축소로 어쩔 수 없는 현상인 듯 하다) 그리고 총을 가진 밀렵꾼들에게 희생 당하는 호랑이들의 모습 은 자연의 삶이 그렇게 아름답지 만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작가분이 그렇게 힘들게 카메라에 담았던 호랑이 일가족의 마지막이 대부분 비극적이었다는 사실은 어쩌면 지금 시베리아 호랑이가 처한 현실의 방증 그 자체 인지도 모르겠다. 문명의 충돌은 비극이라는 혹자는 말씀하시지만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정은 모름지기 가지는 게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인 인간이 가져야 하는 미덕이 아닌가 한다. 우수리 지역에 살아가면서도 필요 이상의 것은 취하지 않는 지역 주민들의 삶의 방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환경 보호가 전 세계적인 테마지만 우리 인간 또한 생태계의 일부임을 이토록 절실하게 느끼게 하는 책은 처음이다. 막연히 궁금했던 연해주의 자연과 동식물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다양한 사진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진다.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 꽉 차 있는 보기 드문 책이다. 마지막으로 평생을 호랑이 촬영에 바치고 이제는 멸종 위기에 처한 호랑이 보호에 힘을 쓰시는 저자 분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