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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즈
제시 버튼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17년 9월
평점 :
'뮤즈'라는 단어를 들으면 제일 먼저 무엇이 생각나시나요? 뮤즈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춤과 노래, 음악, 연극, 문학에 능하고, 시인과 예술가들에게 영감과 재능을 불어넣는 예술의 여신입니다. 또한 지나간 모든 것들을 기억하는 학문의 여신이기도 하죠. 그래서 예술가들은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대상을 '뮤즈'라고 칭학 시작했습니다. <뮤즈>라는 이 작품에서도 예술가와 함께 작품의 영감인 뮤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작가는 '제시 버튼'인데요. 영국에서 작가 겸 배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4년에 첫 소설 <미니어처리스트>를 발표했는데요. 휴가 때 국립박물관에서 '미니어처 하우스'를 보고 영감을 받아 쓴 작품이라고 해요. <뮤즈>는 그녀의 차기작인데요. 이 두 권의 소설을 통해 제시 버튼은 '여성'의 이야기를 꾸려가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닌 작가라는 점을 입증했는데요. 뮤즈라는 이름 뒤에 가려져 있던 여성 예술가들의 사랑과 욕망을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1967년 영국 런던과 1936년 에스파냐 안달루시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시대적·사회적으로 멸시받아온 여성 예술가의 위치 또한 생각해보게 만듭니다.
<뮤즈>의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해 드릴게요. 1936년, 에스파냐 안달루시아의 열어덟 살 소녀 올리브는 화가를 꿈꾸며 다락방에서 몰래 그림을 그립니다. 화가 이삭과의 사랑에 힘입어 올리브의 실력은 폭발적으로 발전하고, 마침내 파리 화단에 그림을 발표하며 전세계의 화제로 떠오릅니다. 다만 화가의 이름이 올리브가 아닌, '이삭 로블레스'로 바뀌어 있을 뿐이죠. 1967년, 영국 런던의 스켈턴 미술관의 타이피스트이자 작가 지망생인 오델은 요절한 천재화가 이삭 로블레스의 미발표 유작을 발견합니다. 호단은 30년 만에 다시 떠들썩해지지만, 오델만은 어딘지 그 그림에 미심쩍은 곳이 있다고 느끼는 데서 사건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뮤즈>는 1936년 에스파냐의 이야기와 1967년 영국의 이야기를 번갈아 가며 보여주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각기 다른 이야기로 보이지만 '루피나와 사자'라는 미술 작품을 통해 하나의 스토리로 귀결되고 있어요. 미래와 과거를 병치해서 결말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긴장감이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작품에 대한 미스테리를 후반부까지 올곧게 이끌어나가고 있어서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덮을 수가 없는 소설이었습니다.
"누구나 노력한 만큼 결과를 얻는 것은 아니다. 배에서 낯선 사람과 대화를 나눈다거나, 인생의 여정을 바꾸어놓는 여러 순간을 마주하는 것은 순전히 행운에 좌우된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그 누구도 추천서를 써주거나 비밀을 털어놓는 상대로 골라주지 않는다. 그것이 그녀가 내게 준 가르침이다. 운이 좋으려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 패를 제대로 들고 있어야 한다는 것."
과거(1936년)와 미래(1967년)에서 각 여성 예술가를 대표하는 주인공은 '올리브'와 '오델'입니다. 두 인물은 비슷하면서도 삶과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데요. 올리브는젊은 여성으로서 여성스러운 면모를 보이기도 하지만, 과거 여성에게 부과되어온 성 역할을 과도하게 수행하지는 않습니다. 가차 없이 이기적이고 목표 지향적이며, 시장성에 대한 자신감은 없더라도 비전만큼은 뚜렷하게 지닌 올리브는 작가의 환상 속 예술가를 표상하고 있습니다. 올리브는 예술가로서의 삶이 전부이기 때문에 자신을 전부 예술에 쏟아붓고, 심지어 현실의 삶마저 희생시킵니다.
반면 오델은 깐깐하고 필사적이며, 창의적이고 사랑스럽고, 자존감이 높으면서도 전전긍긍하는 인물입니다. 오델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트리니나드 토바고 출신으로 식민주의라는 역사의 산물입니다. 오델은 올리브와는 다른 예술가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자신의 재능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는 데는 자신감이 부족하지만,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알고 창조적 세계관 속에서 타인을 존중하는 면모를 보입니다.
"올리브는 테레사가 머리를 빗겨줄 때 앉는 의자에 테레사를 앉혔다. 올리브의 붓 터치에는 확신이 차 있었고, 자신감과 가능성의 공간에서 그림을 그렸다. "참 엄숙한 눈이지." 올리브는 패널에 붓을 대면서 말했다. "조그만 코 위에 너무나 짙고 조심스러운 눈이야. 너랑 이삭은 내 마음속에 목판화처럼 새겨졌어."
올리브는 점차 그 방에서 벗어나 자신의 예술적 비전에 다가감과 동시에 표정이 흐트러졌다. 테레사는 거기에 들어갈 수 없었지만, 그것의 근원이 된 느낌이었다. 테레사는 자신이 사라지고, 올리브가 원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이 유령 역할로 기꺼이 빠져들었다. 테레사는 아무도 볼 수 없는 존재가 되었지만, 누군가 또렷이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아티스트와 뮤즈라고 이야기하면, 우리는 머릿속에서 나도 모르게 아티스트는 남성, 뮤즈는 여성으로 단정짓고 맙니다. 제시 버튼은 이 점을 파고 들었는데요. 제시 버튼이 작품 속에서 표현하고 있는 뮤즈에게는 성별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게 작가가 <뮤즈>를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포인트라고 생각했습니다. 뮤즈에서 남성은 여성의 뮤즈가 되고, 여성이 여성의 뮤즈가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페미니즘'이라고 하면 뚜렷한 이유를 알 수 없는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이 많으실 텐데요. 이 작품도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를 올리브와 오델의 개인사와 연결시켜서 여성 예술가인 주인공들의 시점에서 페미니즘 문제를 바라보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소설에서 완전한 자유, 재정적 독립, 그 누구에게도 의존할 필요가 없는 상태, 남성이 여성의 삶 무대 가운데에 서지 않는 세상, 여성이 섹스와 고독 둘 다 고를 수 있는 세상의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오히려, 남성 스스로 자신에게 무엇이 이로운지 안다면 그 세상을 축복하고, 함께 혜택을 누리게 될 겁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여성은 얼마나 놀라운 존재인지요."
개인적으로 저는 <뮤즈>를 읽고 작가님의 다른 작품이 궁금해질 정도로 흥미로웠습니다. 최근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들이 서점을 점거하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요. 스스로가 눈치채기도 전에 뮤즈를 여성으로 단정지어버리는 사람들의 오류를 짚어주고, '뮤즈'라는 소재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바를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