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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탕 1 - 미래에서 온 살인자, 김영탁 장편소설
김영탁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곰탕을 먹어본 지 무척 오래되었습니다. 연구회 오라버니들을 따라가 먹어 본 게 마지막이었으니 제법 되었지요. 간을 하지 않은 채 먼저 국물 맛을 보고, 간을 할 후 다시 맛을 보는 걸 습관처럼 하라고 했습니다. 집에서 만들기 어려운, 제대로 만들려면 불가능에 가까운 곰탕은 사골만 우려내 만든 사골국과는 다른 맛이 났습니다. 입안에 쩍쩍 들러붙는다고 할까요. 누군가는 깍두기 국물을 부어 묘한 맛을 즐기기도 하겠지만 저는 파를 조금 더 넣어 즐기는 편입니다. 여기서 잠깐, 곰탕과 설렁탕은 어떻게 다를까요? 곰탕은 주로 한우 양지, 사태 등 고기를 이용해 끓이고 설렁탕은 사골을 주로 하여 끓입니다. 식당마다 조금씩 비율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그렇습니다. 노년의 아내가 사골을 끓이기 시작하면 며칠 동안 어딜 가려는 걸까 염려하는 남편도, 점심엔 설렁탕, 저녁엔 곰탕을 시켜 먹으며 구속될까 염려하던 MB도 막상 그것들을 먹을 때는 맛나게 먹었겠죠. 입을 쩝쩝 다시면서.
음식 만드는 일에 웬만해선 겁을 안내는 저이지만 15년 전 사골을 끓인 이후로 뭔가를 고아 내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열 살 남짓부터 스무 살이 넘도록 때때로 이런저런그런 것들을 커다란 들통이나 솥에서 끓여내다 보면 지겨워질 만도 하지 않겠어요? 그래도 남이 끓여준 건 먹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곰탕이나 도가니탕, 설렁탕, 꼬리곰탕 같은 것들. 추운 겨울이나 몸이 아플 때 곰탕 한 그릇이면 가뿐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진한 육수가 위에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위통에 시달리는 요즘도 때때로 생각납니다. 곰탕은, 추억의 맛일까요?
2063년 근미래의 부산에는 곰탕이 없습니다.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는 겁니다. 구제역으로 가축을 죽여 멸종시키고 만 미래인들은 단백질 합성고기니 곤충 단백질이니 하는 걸 버리고 희한한 신종 식용 가축을 만들어냈습니다. 쥐를 닮은 생김새에 소고기의 노린내를 가진 '그것'을 그냥 '그것'이라고 불렀습니다. <곰탕 1>의 주인공 이우환은 '그것'을 가지고 요리를 하는 국물 음식 식당에서 주방보조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주방장이 국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준대도 거절할 만큼 바람직하지 못했던 맛이었나 봅니다. 사장은 주방장에게 오래전 먹었던 고깃국, '곰탕'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모자라 결국 주방장을 통해 이우환에게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권합니다. 곰탕의 비법과 재료를 사가지고 돌아오면 돈을 주겠다고 합니다.
시간 여행선엔 열 세명이 탑니다.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여행이라고 했습니다. 가는 것도 돌아오는 것도. 결국 함께 출발한 열 세 명 중 두 명만이 2019년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주인공인 이우환과 스물도 안 된 소년 김화영은 바다를 헤엄쳐 뭍에 닿았습니다. 죽일 사람이 있어 왔다던 화영은 떠나고, 이우환은 부산 곰탕집에 취직합니다. 그 집의 사고뭉치 아들 이순희, 그의 여자친구 강희와는 특별한 인연일지 모른다는 예감이 들지만 애써 부인합니다.
부산의 강력반 양창근 형사는 순희가 싸움질을 하는 현장에서 발견된 시신을 조사하다 묘한 점을 발견합니다. 이게 과연 말이 되는 일인가. 시신의 옆구리는 무언가에 정교하게 도려내져 있었지만 잘린 부분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한편 이 책을 추천한 강풀 작가의 본명 '강도영'과 같은 이름의 까칠한 형사도 맹활약을 하는데요. 작가의 이름이 김영탁인 것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괜히 웃음이 나왔습니다. - 강풀의 타이밍 시리즈 주인공이 김영탁이거든요.
이 소설이 곰탕 레시피를 구하기 위한 한 남자의 모험기였으면 심란하지 않았을 텐데, 그 남자가 얻어 가는 건 레시피와 재료가 아닌 다른 것이었습니다. 곰탕을 끓이고 먹고 나누는 동안에 쌓여가는 건 사십 대 중반이 되도록 느끼지 못했던 '정'이었던 겁니다. 곰탕의 국물만큼 뜨끈한 정이 흐르는데, 식당 가족들이 품어준 것도 아닌데 스스로 깨쳐가며 쌓아갑니다.
한편, 부산의 형사들은 각자 자신의 촉과 추리에 따라 맡은 사건들을 추적해가는데, 그 끝은 미래인을 향하고 있습니다.
<곰탕 1>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김조한의 'Cause you're my girl'이 흘러나오며 광고 배너가 떠줘야 할 것 같은 반전이 있어 잠깐 심장이 쿵떡.
이 소설은 여러 장르가 혼합되어 있으나 전혀 어색하지 않고 흡인력이 있으며 스크린을 메울법한 영화 같은 장면들이 종이를 채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