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의 특권
아멜리 노통브 지음, 허지은 옮김 / 문학세계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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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지금까지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이름으로,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새롭게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말하자면 열심히 키우던 캐릭터가 망캐가 되어버리면 눈물을 머금고 '에라 모르겠다. 처음부터 다시 키우자'라는 심정으로 마음에 드는 새 캐릭터를 만들어서 초보 사냥터에서 요령 좋게 사냥을 하는 - 하지만 전에 키우던 본캐 장비를 팔아 아덴은 넉넉히 챙겨두었으니 풍요로운 환경에서 열심히 필드를 누비는 그런 일이 현실에서도 일어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환경과 위치가 달라진다고 해도 사람의 본성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니 결국은 같은 삶을 반복하고 말뿐이라는 걸 깨달은 후에는 인생 리셋 같은 걸 꿈꾸지 않게 되었습니다. (인생 역전은 가끔 꿈꿉니다만)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을 리셋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주 풍요로워 보이는 사람의 인생을 내 것인 양 살 수 있다면 갈등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리셋을 꿈꾸지 않는 저라도 순간적인 갈등은 할 것 같습니다.

아멜리 노통브의 <왕자의 특권>의 주인공 밥티스트 보르다브는 자신의 발밑에 바로 그 기회가 온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밤 모임에서, 낯선 사람이 갑자기 자신의 집에 들어와 죽어버린다면 망설이지 말고 택시에 올라타 병원으로 가라는, 이상한 이야기를 나눴던 것이 현실이 되어버렸는데요. 올라프 질더라는 남자가 자동차가 고장 났는데, 휴대폰도 없고 근처의 공중전화도 고장 났다며 전화를 한 번 쓰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하지만 남자가 번호를 누르고 연결이 되기를 기다리던 중 갑자기 쓰러지고 그대로 죽어버립니다. 이런 일이 다 있을까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상상을 시작한 공상가 밥티스트는 체격과 대략적인 인상착의가 비슷한 그의 인생을 자신이 대신 살기로 결심합니다. 지긋지긋한 회사는 때려치우고 말이지요. 시간이 흘러 시신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죽은 건 밥티스트라고 여겨질 거라 믿습니다. 

밥티스트, 아니 이젠 올라프인 남자는 '전'올라프의 신분증과 자신의 예금 잔고와 비슷한 현금이 들어있는 그의 지갑을 들고, 고장 났다던 그의 차를 몰고 멀쩡한 공중전화를 지나 그의 집이 있는 베르사유로 향합니다. 집의 동태를 살피고 멋대로 화장실을 사용한 김에 허기를 채우려 요리를 해 먹었는데요. 아, 두근두근. 저 같은 안정기 심박수 103인 사람은 당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무단 침입한 남의 집에서 오믈렛을 해 먹다니요. 심지어 '전'올라프의 아내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자연스럽고 대담하게 응대합니다. 조금은 긴장 한 것 같지만 괜찮습니다. 어쩌면 속으로는 저만큼 심장이 달음박질치고 있을지도 모르죠. 
'현'올라프는 '전'올라프의 지인인척하며 그 집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남편의 부재중에 손님이 와서 묵고 가는 일이 다반사인지 아내 역시 자연스럽게 그를 대합니다. 

그녀를 지그리드라고 부르기로 한 '현'올라프는 선임자- 전 올라프를 어느새 선임자라고 부르고 있더군요-의 모든 것을 누립니다. 그의 저택, 그의 식량, 그의 엄청나게 많은 샴페인... 선임자의 통장은 마르지 않는 샘물인가 봅니다. 지그리드가 명품 사냥을 다녀도 한도가 초과되는 법이 없는 걸 보면요.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지그리드의 옛날 성이 밥티스트라지 뭐예요. 
소름 끼치는 일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모든 것이 우연이라기엔 석연찮은 부분이 한둘이 아닙니다. 외모와 키가 비슷한 한 남자가 전날 나누었던 담소대로 그의 집에 찾아와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었는데, 자동차도, 공중전화도 모두 멀쩡했던 것도 이상한데, 밥티스트일적에 받았던 대량의 포도주 구매에 관한 이야기... 어쩌면 그 포도주가 올라프의 초대형 저장고에 들어가 있는 건 아닐까요? 그냥 상표만 동일한 건지. 저 역시 이름만 만화에서 여러 번 보았던 돔 페리뇽을 이 집에서는 마음껏 마실 수 있다지만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불안한 건 불안한 거고, 이 집에는 무슨 마력이 있는지 사람의 긴장을 놓게 합니다. 

과연 선임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뭘 하는 사람이었을까요? 스파이? 대부호? 조직의 형님? 그의 아내조차 확실하게 말을 하지 않기에 물어볼 수도 없습니다. 저에게만 살짝 말해달라고 해 볼까요? .... 비밀인가 봅니다. 뭐, 적어도 눈사람은 아니겠죠.

<왕자의 특권>이라는 소설이 워낙 미스터리적인 요소가 있다 보니 읽는 도중 추리소설로 착각했습니다. 올라프는 누구인가, 이렇게 타인의 신분을 가지고 있어도 괜찮은 건가. 그만. 그런 건 그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미스터리를 꼭 풀고야 말겠다는 마음가짐으로는 이 소설을 즐길 수 없습니다. 그냥 이 상황 자체를 즐기면 됩니다. 이대로도 좋지 않은가요.

신분이나 신원을 교체함으로써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된다는 점에서는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그것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너무 심각해하지 말아요.

** 제목이 어째서 <왕자의 특권>이냐면, 부자는 빚이 많아도 여전히 부자의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특권이 있다는 겁니다. 오히려 빚이 많을수록 더욱 대우받는다는 건데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확실히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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