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물든 방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0
앤절라 카터 지음, 이귀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씩씩하지만 가난한 엄마의 외동딸이 은백색 새치가 있는 검은머리와 멋진 수염을 가진, 프랑스에서 최고로 부유한 남자인 후작에게 청혼을 받고, 그와 함께 먼 곳에 있는,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몽환적인 그의 성으로 향합니다.

그것이 비극의 시작임을 알지 못한채.

금박 거울에 비친 나를 쳐다보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경주마를 감정하는 전문가의 감식안, 심지어 시장에서 잘라놓은 고깃덩어리를 자세히 바라보는 가정주부의 눈을 하고 있었다. 난 그전까지 그의 그런 시선을 한 번도 보지 못했거나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완전히 육체적인 탐욕, 그리고 그것은 그의 왼쪽 눈에 걸린 외알 안경 때문에 이상하게 확대되어 보였다. 욕정으로 날 쳐다보는 그를 보았을 때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그에게서 눈을 돌리다가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갑자기 나는 그가 쳐다보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내 창백한 얼굴, 내 목의 근육이 마치 가느다란 철사 줄처럼 튀어나온 것을 보았다. 그 잔인한 목걸이가 내게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를 보았다. 그리고 순진하고 고립되어 살아왔던 내 생애 처음으로 내 안에 있는 타락의 잠재성을 느끼고는 숨이 막혔다.

그다음 날 우린 결혼했다.

- p. 17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 세워져 있는 관의 뚜껑을 약간 열었다. 그 안에는 고통으로 입을 벌린 채 굳은 얼굴이 있었다. 나는 맥을 못 추고 아직까지 손에 들고 있던 열쇠를 떨어뜨렸다. 열쇠는 그녀의 피가 고여 있는 웅덩이로 떨어졌다.

그녀는 한 개가 아니라 수백 개의 쇠못에 박혀 있었다. 흡혈귀 나라의 후예인 그녀는 아주 최근에 죽은 듯 피투성이였다...... 오 하느님! 그가 상처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네? 이 끔찍한 방에 둔 지 얼마나 된 것일까? 파리의 화창한 빛 속에서 내게 구혼하던 기간 내내 여기 두었을까?

나는 그녀의 관을 가만히 닫고 울음을 터뜨리며 흐느꼈다. 그에게 희생된 다른 여자들에 대한 연민과 나도 그중 하나라는 사실이 주는 끔찍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 p. 49

 

 

엔절라 카터는 영국의 소설가입니다.

고딕소설과 민담, 동화등에 흥미를 가진 그녀는 그 이야기들의 숨어있는 그 무엇을 끌어내고자 했지요. < 피로 물든 방 > 이라는 작품에서 그녀는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인간 내면에서부터 끌어 올려지는 공포를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인지 여자 에드거 알란 포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에드거 알란 포의 분위기에 관능미를 더한 것 같은, 그런 문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신화를 사회적, 문화적으로 형성된 허구라고 보았고, 그 허구를 무너뜨리기 위해 종교, 자본주의, 가부장제를 거침없이 해부하고 뒤집어 놓았지요.

사실 우리가 알고있는 재미있는 동화가 얼마나 가부장적인지... 여자는 남자의 손길을 기다리기만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상황을 헤쳐나간다는 것은 꿈꾸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작가에 의해 의도된 사실이라면요...?

<피로 물든 방>은 동화를 재구성했다기 보다는 동화에서 모티브를 찾아 전혀 다른, 그러나 강렬한 느낌으로 서술합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페미니즘을 기본으로 하여 패러디한 그런 동화가 아닙니다. 작가 앤젤라 카터는 페로에 의해 외곡된 젠더를 원래의 형태로 되돌려놓습니다.

이 책 <피로 물든 방>에는 10개의 단편이 실려있습니다.

푸른 수염을 모티브로 한 '피로 물든 방'외에도,

미녀와 야수를 모티브로 한 '리용씨의 구혼', '타이거의 신부',

장화신은 고양이를 모티브로 한 '장화신은 괭이',

덴마크의 전설을 재구성한 '마왕',

백설공주를 모티브로 한 아주 짧은 단편 '눈의 아이',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모티브로 하였으나 말해주지 않으면 잘 모를 것 같은 '사랑의 집에 사는 귀부인',

빨간모자를 모티브로 한 '늑대인간','늑대친구들','늑대 - 앨리스'라는 단편입니다.

각각의 단편은 제 나름대로의 색깔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로테스크하기도 하지만, 에드거 알란 포를 좋아하는 '성인'이라면, 이 책을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빨간 눈에 침이 줄줄 흐르는 회색빛 주둥이를 가진 커다란 늑대였다. 산지기의 딸이 아니었다면 보기만 해도 무서워서 죽었을 것이다. 늑대들이 으례 그러하듯 소녀의 목을 물려고 덤벼들었다. 그러나 소녀는 아버지의 칼을 크게 휘둘러 늑대의 오른쪽 앞발을 잘라버렸다.

(중략)

소녀는 할머니가 몹시 편찮으셔서 침대에 누워 불편하게 잠들어 계신 것을 보았다. 끙긍 신음하며 떨고 계셔서 할머니에게 열이 있다고 소녀는 짐작했다. 이마를 만져보니 타는 듯이 뜨거웠다. 소녀는 할머니께 차가운 물수건을 올려드리려고 바구니에서 헝겊을 꺼내다가 늑대 발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러나 그것은 늑대 발이 아니라 손목에서 잘려 나온 손이었다. 일을 많이 해서 거칠어지고 나이 들어 검버섯이 핀 손. 가운뎃손가락에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었고 집에손가락에 사마귀가 있었다. 사마귀를 보고 소녀는 그게 할머니 손이라는 것을 알았다.

- p. 2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