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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대 감기 ㅣ 소설, 향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평점 :
각자의 방법으로 삶과 사회에 맞서는 사람들
서로 다른 우리가 서로 함께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하여
하얀 붕대로 연결된 사람들의 이야기
“-우리가 반드시 같아질 필요는 없어. 억지로 그러려고 했다간 계속 싸우게 될 거야.
같아지겠다는 게 아니고 상처받을 준비가 됐다는 거야, 진경이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들이 아니고 너한테는, 나는 상처받고, 배울 준비가 됐다고!
네 생각이 어떤지 궁금하다고. 그러니까 아무 말도 안 하고 멀리서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는 일은 제발 그만둬.”
우리는 모두 '다르다.'
머리로 이를 인정하는 일은 쉬우나, 현재에서 다르다는 사실은 공격 대상이 된다. 그 속에서 약자의 '약함'은 전혀 존중받지 못한다.
그러한 약자를 권리를 주장하려는 움직임 사이에서도 '다름'은 쉽게 내분의 씨앗이 되고 또 다른 차별과 멸시를 낳는다.
우리는, 나는, 나와 다른 '너'를 공격하고 싸우는 데 지쳤다. 우리에게는 서로를 감싸 안는 이야기가 필요했다.
이 이야기는 어느 미용실에서 시작된다. 미용실을 운영하는 실장 해미는 자주 찾아오지만 말 없고 무뚝뚝한 손님에 대해 생각한다. 책을 좋아하는 듯하면서도 그녀가 추천한 책에는 별다른 말이 없는 손님 말이다. 말 없고 무뚝뚝한 은정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깨어나지 않는 아들 서균을 키우고 있는 엄마이다. 홍보회사의 능력 있는 직원이었던 은정의 시간은 아이가 쓰러진 이후 멈춰 버렸다. 해미에게서 시작된 이야기는 레디컬 페미니스트 지현에게로, 진경에게로, 세연에게로...... 여러 명의 여성 인물들에게로 연결된다.
“자주 보지 않아도 괜찮아. 네가 가끔 울고 싶을 때, 말할 사람이 필요할 때, 그럴 때 나한테 전화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언제 울고 싶은데?
-지금.”
『붕대 감기』는 작가정신 출판사의 '소설, 향' 시리즈의 신작이다. '향'이 가진 다양한 의미처럼 소설 한 편 한 편이 누군가에게는 즐거움이자 위로로, 때로는 성찰이자 반성으로 서술되는 중편소설 시리즈이다.(출처:작가정신 블로그)
저자 윤이형은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2005년 「검은 불가사리」로 중앙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2014년, 2015년 젊은작가상, 2015년 문지문학상, 2019년 이상문학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소설집 『셋을 위한 왈츠』 『큰 늑대 파랑』 『러브 레플리카』 『작은마음동호회』, 중편소설 『개인적 기억』, 청소년소설 『졸업』, 로맨스소설 『설랑』 등이 있다.(출처:YES24 작가소개)
문학성이 정말 좋았던 작품이었다. 문체는 깔끔하면서도 섬세해서, 술술 잘 읽히면서도 계속 읽고 싶어지는 이야기였다. 모든 인물에 대한 묘사 또한 생생했고 무엇보다 내면 묘사가 출중해서, 캐릭터가 아닌 한 사람을 대하는 듯했다.
이 책에는 여러 명의 여성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 각자는 서로 다른 삶,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섬세하면서도 깔끔한 필체로 그들을 둘러싼 상황과 그 속에 살아 있는 인물들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의 삶과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각자 다르게, 여성으로서 사회를 바라본다.
그렇다. 이 책은 페미니즘에 관한 이야기이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이슈가 되었던 모든 사건을 직설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정말 많이 놀랐다. 내가 알게 모르게 그어뒀던 선을 거침없이 넘어버리는 작가들이 있는데, 윤이형 작가가 그중 하나가 되었다.
이 책에서는 다양한 인물이 다양한 시각을 가지고 현대의 페미니즘을 바라본다. 무엇보다 좋았던 부분은 책이 '정답'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정답을 정해 버리면 그것이 아닌 다른 모든 생각은 틀린 것이 되니까 말이다.
한 명의 여성으로서, 사람으로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 책이었다.
몇 년간 페미니즘이 일으킨 물결에 휩쓸리면서 수많은 의견을 접하고 글을 읽었다. 많은 부분에 공감하고 함께 분노하면서도, 내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면도 있었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닌지 끝없이 갈등하고 고민한 끝에도, 결과는 같았다.
다름을 이유로 서로를 대상화하고 멸칭으로 부르며 물고 뜯고, 의견의 차이마저 혐오의 빌미가 되는 흐름에 나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안이한 방법이라 할지라도, 나는 좀 더 포용적인 방법으로 세상이 바뀌었으면 했다. 혐오로 바뀐 세상에 남는 건 결국 혐오뿐이리라 생각했다.
나 같은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소설이었다고 생각한다. 서로를 물어뜯기보다는 이해하는 데 노력을 할애했으면 한다. 너와 내가 같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함께할 수 있었으면 한다. 이 책이 그런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아 기뻤다.
한동안 내 손목에 감긴 붕대의 끝이 어디로 연결돼 있는지, 그 끝을 물끄러미 응시할 것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다가, 무언가를 하니까 또다시 당신은 자격이 없다고 비난하는 건 연대가 아니야.
그건 그냥 미움이야.
가진 것이 다르고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다고 해서 계속 밀어내고 비난하기만 하면 어떻게 다른 사람과 이어질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