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즘으로 읽는 한국 헌정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69
김욱 지음 / 책세상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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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밸리의 모순성은 항간에 떠도는 논의들 속에서 사리지고 만다. 마키아밸리즘은 흔히들 도덕에 신경쓰지 않고 정치적 결과에 주목해야 한다는 악의 권력기술로 개념화되어 있다. 저자는 그런 단순화된 마키아밸리즘의 논의에 아무런 성찰없이 편승해 있다. 마키아밸리즘이라는 방법론적 도구를 빌려 왔다면 최소한의 마키아밸리에 대한 탐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로마사 논고'와 '군주론'의 역동적이고 모순적인 차이를 간단히 우회하고 있다. 더구나 꼴통 좌파인 하나인 알튀세을 치장하여 자신의 방법론적 지평의 부실함을 감추려 한다. 저자는 한국적 상황에 서구 이론을 적용하려면 적어도 자신이 이야기하는 사람의 논의에 대해 충실해져야 할 것이다. 인민의 자율성에 주목한 로마사 논고와 군주의 권력에 주목한 마키아밸리의 차이들에 어떻게 모순적으로 역동하는지에 좀더 주목해야만,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더불어 문제는 한반도의 역사적 적용의 문제이다. 부실한 방법론적 지평을 일관성과 복잡성을 고려하지 않는 적용으로 두루 문제를 남기고 있다. 서투른 습작 수준에서 과연 얼마나 벗어난는지 의문이 드는 책이다. 만약 그런 안타까움이 나만의 것이라면 좋겠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저자는 정치 윤리의 현대적 발전에도 무기력하고, 한국의 역동적인 정치변동과정에 대해서도 엉성하기 그지없다.

저자는 예언자도 그리고 역사가도 되지 못했다. 더구나 이론적으로 탄탄한 무장에 실패하고 있다. 저자는 '무장한 예언자는 모두 승리하지만,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는 패배한다‘『군주론(The Prince,1513)』는 군주론의 경구를 성찰해보고자 했다. 저자는 이 문장의 문제와 한계 그리고 가치를 다시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더딘 이론적 성찰 그리고 섣부른 적용의 위험. 좀더 꼼꼼하고 깊고 너른 성찰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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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복종의 이유
하워드 진 지음, 앤소니 아르노브 인터뷰,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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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복종의 구체적 양상에 대한 좋은 내용임은 틀림없다. 문제는 좋은 내용형식이 멋진 표현형식을 얻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책의 편집자는 너무 '포스틈모던적'이어서인자, 아니면 독자와의 소통에 별로 심혈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어선지. 소통하기가 참 어렵다. 하긴 편집도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여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내가 너무 고리타분한 편집에 길들여져서 인지도.. 하지만 읽기가 불편하고 힘겹다.

하긴 내용이 좋은데 뭐가 문제냐 하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내용 자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여간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아니다. 진의 책들 중 오만한 제국의 '법과 정의'의 장과 함께 읽어야만 이 책의 핵심적 내용이 쏙 들어오게 되어 있다. 역자는 독자에 대한 내용형식적 배려와 표현형식적 배려에 좀더 신경을 썼으면 좋았을 것이다,
친숙한 진의 내용과 표현을 너무 멀리 띄어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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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의 역사
매릴린 옐롬 지음, 윤길순 옮김 / 자작나무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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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행복해 할 줄 모른다. 어떻게 행복을 꾸려나가야 할지를 잃어버렸다. 헐리우드의 영화를 볼 때, 주일에 종교성지를 찾을 때야 행복을 떠올려본다 그런데 그곳에 마련된 일괄생산 방식의 행복상품은 끊없는 소비의 욕망을 불어일으킬 뿐이다. 소비의 욕망은 행복의 갈증을 일으키고 더더욱 종교상품에 의존하게 된다.

그러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신체와 몸에 대한 행복이 무엇인지 성찰하지도 않는다. 기껏 해봐야 절대적 신성에 매달리거나, 신은 없으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냉소적 절망의 함정에 빠질 뿐인데, 고통스럽게 무슨 생각을 해야 한단 말인가! 지배권력의 학대와 일상의 모멸을 버티기도 힘든 순간 순간 우리는 행복과 기쁨의 정서가 어떻게 가능하고, 그것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를 묻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땅에서는 이룰 수 없는 성스러운 가치로 비루한 존재의 한계를 알게된다. 그리고는 성직자도 할 수 없는 그 경지를 저 세상에 던져놓고, 이 땅에서는 저속한 속물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냉소와 체념에 빠져든다. 하늘의 명령을 알고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죄책과 고통 속에 절망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게 인간이라는 종이 아니겠내고 자신을 변명하고 위로한다. 공격성과 지배의 욕망은 어느새 불가피한 것이 되고, 불가피성을 넘어 뻔뻔스레 정당성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런 세상의 극단적 상징체계의 비극을 파고드는 멋진 책이다.

자신의 신체적 자기결정권이 어떻게 지배권력에 의해 역사적으로 파괴되어왔는지. 지금도 우리 주위를 떠도는 담론장치 속에서 저자의 역사적 퇴행물들을 발견하게 된다. 존재의 행위능력을 불구자로 만드는 성교육과 관능적 기쁨과 즐거움을 자폐적 광기로 폐쇄하는 신비주의적 도덕주의. 하수도와 상수도를 뒤섞어 놓은 이중적 성도덕. 그 어느 하나도 만만한 것이 없는 이 땅에서 이런 이야기가 확장/심화되는 것을 바라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일까?

구좌파의 한심한 경제결정론과 자유주의의 천박한 프리섹스, 그리고 보수주의의 한심한 도덕주의, 극우의 몰상식한 야만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이 책은 너무 멀리 있다. 하지만 기쁨과 즐거움을 행복으로 구성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저자는 너무 가까이 있다. 그래서 너무 위험한 책이다. 무릇 좋은 책이란 화약과 같은 책이다. 이 책은 뇌관을 제대로 작동시킬 줄 안다면 멋지고 황홀한 경이를 선사할 만한 책이다. 최근에 나온 아내두 멋지다. 멋지다 옐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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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박현욱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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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방의 매커한 연기 속에서 버거운 현실과 비루한 나를 잠시나마 망각하고 싶은 때가 있다. 답답한 현실에서 환상으로 도피하고 싶은 때가 있다. 날품팔이 인생들이 유전하는 만화방마저도 상업화의 바람 속에서 대부분 현대화되었다. 노곤한 인생살이를 쉬어가던 아니 마지막 자존심을 부여잡고 버티던 이들이 대화를 나누던 만화방의 헛꿈들은 이제 매끄러운 상품의 외양을 갖추고 있다.

대중예술과 고급예술의 거짓 대립 속에서 대중소설의 역량을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운 지경이다. 희대의 히트를 친 대중소설들은 기초적 형식과 양심마저도 갖추지 못한 짜깁기의 남루함을 벗어나지 못한 실정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저자의 글은 대중소설의 가능성을 보여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뭔가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 하지만 잔뜩 폼만 잡는 이들의 허랑한 위세를 뻔뻔스레 까발린다. 천박함에 대한 솔직함의 미덕. 저자의 강점이다.

미학적 권위주의에 휘둘려 비루한 언저리 인생들의 지리한 일상에 관심이 없는 이들에게 저자는 할 말이 있을 것이다. 니들이 폼생폼사 어떻게 말해두 쫀쫀하고 야비한 3류인생들이란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구? 아뿔사! 그런데 안타깝게도 저자는 그런 말을 할 권리를 스스로 닫아걸고 말았다. 한없이 가볍게 살아가려는 저자의 노력은 근엄한 영웅주의에 가려지고 만다. 허접한 형식으로 반영웅주의의 일상을 그려내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뭐 해두 천재인 잘난 척만 가득하다. 뭐, 천재의 동기가 가당치도 않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기는 하다.

그런데 카프카의 성두 읽고 다양한 고전을 섭렵한 놈이 어떻게 이토록 성장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지옥의 한철을 보낸 주인공은 교육에서 아무것도 전유하지 못한다. 상처와 학대 속에서 힘겨워하든 가족을 통해서도 주인공은 성장하지 않는다. 조울증의 보호고치에 갇힌 고독한 영웅은 스스로의 말처럼 소통할 줄 모르는 바보, 천지이다. 친구와 세상과의 만남에서 성장하지 않는 독특한 바보천재는 시대와 삶의 풍경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흔한 상투적 영웅주의의 대중문화적 반복을 벗어나지 못한 채 가족과도 친구와의 우정에서도, 여자친구와의 사랑에서도 강박적 우울증에서 부유한다.

재미없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직조하는 솜씨는 유쾌한 탈주를 그려내는데 쓰이지 않는다. 암기교육, 계급투쟁의 용광로, 도시락과 신발, 가장의 구별짓기 등으로 첨철된 우울한 교육환경과 산업재해와 사기로 건실한 가정에서 폭력 가장으로, 착한 것이 아니라 못난 아버지, 행상하는 어머니 등의 힘겨운 가족 환경은 주인공으로부터 튕겨나간다. 주인공을 관통하고 육체와 정신에 스며들지 않고 망망대해를 떠돈다.

심각한 고통과 아픔을 웃어넘기는 지혜를 찾아가기에 저자는 겁쟁이다. 두려움과 맞서는 ‘용기’는 어설픈 치기로는 어림도 없는 법이다. 어설픈 치기가 버려내는 시대의 아픔, 상처의 진실이란 허망하기 그지없다.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가슴시린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내는 솜씨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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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리라이팅 클래식 3
고병권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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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니체의 위험한 책”을 새롭게 읽으려한다. 니체의 텍스트라는 대양에 빠져 수영을 즐기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고전을 읽을 때 권위에 상투적으로 의지하곤 한다. 그런 진부한 권위주의에서 니체에 대한 전유 문제는 비틀어지게 마련이다. 저자는 고전을 현대화하고, 이를 통해 존재능력의 변형을 꿈꾸지 않는 고전독해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성찰한다. 저자는 니체되기를 통해 니체의 가치를 소화하는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고자 한다. 니체주의에 홀린 사람들의 위험을 벗어나 니체의 친구가 되어 니체에게 공감하는 방법은 무엇인가하고 묻는다.

니체의 다양성에 대한 성찰하는 저자의 전략은 생성과 사랑의 창조이다. 니체의 다양한 리듬에 빠져 생성하는 니체의 즐거움을 만끽하길 기대하는 것이다. 니체가 풀어놓은 생성의 축제에서 독자들이 니체의 현재성를 느끼고 체험하길 고대하는 것이다. 니체에 대한 푸코와 들뢰즈적 혹은 고병권적 소개는 상투적 권위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맛깔스럽다. 저자와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니체되기의 경험에 빠져볼 수 있을 것이다. 사소한 문제는 과연 고병권의 니체는 있는가? 아니 제대로 말한다면 고병권의 니체를 읽은 나의 니체는 무엇인가하는 물음일 것이다.

니체는 역사적으로 ‘위대하게’ 악용되었다. 니체 전유의 위험한 역사와 위험의 내재적 근거에 대해 저자는 간과한다. 니체전유의 위험 요인과 가능성이 무엇인지, 어떤 맥락과 지평에서 발생하고 확산되었는지 묻지 않는다. 과연 왜 니체는 위험한 것인가? 왜 지금-여기에서 니체가 위험한가? 위험의 역사적 사례는 무엇인가? 귀족주의, 초인주의, 인종주의, 민족주의 등과 공모했던 비극적 역사에서 니체의 텍스트는 무엇이었는가? 위험의 구체적 양상과 근거를 드러내지 않은 채 니체에 열광하는 것의 문제가 상식이라면 저자는 역사사회적 거리두기에 실패하고 있다.

과연 니체되기의 위험을 감수할만한 가치는 무엇인가? 그리고 과연 저자는 니체되기의 위험을 감당하고 즐길 가치와 가능성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있는가? 새로운 생성과 창조를 향한 화산이 터지기 직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층에서 꿈틀거리는 것들 중 무엇을 분출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개인적 존재능력의 문제로 오그라든다. 제도와 구조 그리고 행위의 상호연관성 그리고 권력구성능력의 정통성 등이 오로지 개인적 존재능력의 탁월성으로 사라지고 만다.

모순과 갈등의 복잡성을 유아적 개인의 소화 능력 문제로 환원되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니체를 탁월한 유아의 전유 차원으로 전락시킨 후 니체되기의 기쁨에 빠지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니체되기의 능력에 따라 약이나 독이 될 수 있다는 무책임한 소리가 시적 글쓰기의 형이상학성 혹은 시적 자의성으로 은폐된다. 주류글쓰기의 권력 코드를 벗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행복한 체험이지만 너무나 구태에 빠져 지금-여기를 살기에는 무능해보인다. 그래도 니체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히 좋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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