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이 된 할망 - 설문대루트, 신의 길을 찾아 나선 물음표의 순례
한진오 지음 / 한그루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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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덕앚인밧, 엉장메코지, 홍릿물, 청산, 덩개빌레, 두럭산, 진질깍, 소로기통... 발음도 어렵거니와 도대체 글자만으로는 그 의미도 모르겠는 지명들이 마구 쏟아져 나온다. 지도나 검색 같은 이성적 매체로는 찾을 수 없는 지명들로 그저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다. 부록에 지도라도 넣어 표기하면 얼마나 좋을까 불만을 품었지만, 읽을수록 저자가 왜 직접 발로 걸으며 설문대를 찾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글이 아무리 출중한들 직접 보고, 한 번 찾아 가는 것만 하랴. 특히 설문대 흔적과 온기를 가만히 자리에 앉아 느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제주라는 섬을 마주할 때 우리는 대개 설문대할망의 거대한 몸에 매료되곤 한다. 한라산을 베개 삼고 발가락이 닿아 파인 구멍이 범섬의 해식동굴이 되었다는 등 거신에 대한 상상력은 압도적이고 유쾌 발랄하다. 그러나 한진오의 《섬이 된 할망》은 이 거대함의 프레임을 단숨에 깨트리며, 신화의 진짜 온기가 어디서 숨 쉬고 있는지를 직접 걸으며 짚어준다.
저자가 제주 해안가와 마을 곳곳에 흩어진 '공깃돌 바위' 앞에서 얻은 통찰은 가히 경이롭다. 둔중하고 차가운 거석(巨石)들 앞에서 어릴 적 공기놀이를 떠올린 저자는 그 놀이가 다름 아닌 '시간을 만들어가는 놀이'였음으로 해석한다. '일 년, 이 년, 한 살, 두 살….' 공깃돌을 집어 올리며 점수를 세던 언어는 찰나의 놀이에 우주의 세월을 대입하는 신성한 주술과도 같다. 설문대할망이 던지고 놀던 그 거대한 공깃돌들은 단지 신화 속 소품이 아니라, 제주의 옛사람들이 거친 삶 속에서도 여유와 해학을 잃지 않고 겹겹이 쌓아 올린 시간의 마디들이자 삶의 축적이었던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대목은 신의 '배설'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숨을 쉬고 잠을 자고 음식을 먹고 다시 토해내고 배설을 하는 보잘것없는 생리현상만으로도 창조의 권능을 발휘한다." (p.96)
우리는 흔히 창조와 신성을 매끄럽고 고결하며 정제된 영역에 놓아두려 한다. 그러나 설문대할망의 신화는 우스울 정도로 적나라한 생리현상으로 가득 차 있다. 오줌을 누어 바닷물을 가르거나 방귀를 뀌어 바위를 만들고 샘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지극히 원초적이다.
저자의 말처럼, 살아있는 존재가 숨을 쉬고, 먹고, 배설하고, 흔적을 남기는 이 지극히 인간적이고 원초적인 행위야말로 세상을 만들어내는 가장 근본적인 창조의 능력이다.
삶의 부산물과 흔적이 모여 땅이 되고 바다가 되는 신화적 상상력은, 제주의 모진 세월을 버텨낸 민초들의 땀과 눈물, 배설 같은 노동의 흔적이야말로 세상을 지탱하는 신성함 그 자체였음을 깨닫게 한다.
설문대할망은 멀리 있는 관념의 신이 아니라 저마다의 가슴속에서 숨 쉬며, 매일의 삶을 묵묵히 버텨내고 자신만의 시간(공깃돌)을 쌓아 올리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거대한 바위와 오름 속에서 유머러스하면서도 숭고한 삶의 흔적을 읽어내는 저자의 따뜻한 시선 덕분에, 나 역시 내 안의 ‘설문대’를 새로이 찾아보게 된다. 특별할 것 없는 나의 하루와 콧구멍을 통해 들고 나는 호흡조차도 세상을 구성하는 하나의 거대한 창조적 흔적일 수 있음을, 《섬이 된 할망》이 나지막이 일러주고 있다.
이 책은 설문대를 정의하거나 단정짓지 않는다. 정답을 찾거나 고집하지도 않는다. 해석은 자유고 신분고하, 남녀노소 따질 것 없이 저마다 마음 속에 신 한 분쯤은 모실 수 있으니까.
마지막으로 저자의 말을 천천히 함께 따라간다.
"설문대는 하나야. 하나이며 여럿이고 여럿이며 하나인 할망이야. 제주의 옛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속에 자신만의 설문대를 간직하고 있었어."
저자의 물음표는 마침표로 끝나지 않고 느낌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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