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오거스트의 열다섯 번째 삶
클레어 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반타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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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내가 사랑하는 작가, 클레어 노스의 역작 <해리 오거스트의 열다섯 번째 삶>이 반타 출판사에서 새롭게 출간되었다. 절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나 재미있는 소설을 더 많은 사람이 읽을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는데 기쁘기 그지없다.


이 글은 너를 위해 쓴다.

나의 숙적.

나의 친구.

너는 안다, 이미, 틀림없이 알고 있다.

네가 졌다는 걸.


서장부터 흥미를 돋우는 이 소설은 죽은 후 태어났던 연도에 다시 태어나 끊임없이 반복되는 삶을 사는 불멸자, 해리 오거스트의 이야기를 1919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실제 역사와 맞물려 전개하며 남다른 몰입감을 선사한다. 제2차 세계대전과 그 후 냉전에 접어든 미국과 소련의 군비 경쟁, 체르노빌 원전 사고라는 커다란 줄기에서 그 시대상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것도 이 소설의 묘미 중 하나인데, 세계를 아우르는 작가의 통찰력이 제공하는 지적 유희가 상당하다.



세계가 끝나고 있어요. 언제나 그래야 하듯이. 하지만 세계의 종말이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답니다.


여러 번에 걸친 권태로운 생애 끝에 해리 오거스트는 자신처럼 생을 반복하는 불멸자(칼라차크라 혹은 우로보란)로 이루어진 크로노스 클럽으로부터 이 메시지를 전달받는다. 크로노스 클럽은 과거 세대에서 미래 세대로, 미래 세대에서 과거 세대로 메시지를 전달하며 역사의 흐름에 절대 개입하지 않는다는 엄격한 원칙 아래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데, 세계의 종말이 빨라졌다는 것은 역사의 흐름에 변동이 생겼다는 것이고 누군가가 역사에 개입했다는 뜻이었다.

그 주범은 다름 아닌 해리가 과학계에 몸담았던 여섯 번째 생애에서 제자로 만났던 또 다른 불멸자, 빈센트 랜키스. 빈센트는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만물의 근거를 내포한 단 하나의 원자로부터 모든 것을 연역하여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비밀을 풀 수 있는 신과 같은 도구, 퀀텀 미러'를 개발하기 위해 여러 생애를 통해 축적한 지식을 바탕으로 기술 발전을 급속도로 앞당긴다. 빈센트를 저지하려 했던 해리마저도 어떤 변화나 의미도 새길 수 없는 권태로운 윤회의 삶에 질려 한동안 퀀텀 미러의 개발에 동참하고 그 과정에서 긴 생애 동안 느낄 수 없었던 행복감마저 만끽하지만, 빈센트와 자신이 세계의 종말을 앞당기는 장본인이라는 죄책감, 자신의 등 뒤에서 크로노스 클럽의 지부를 공격한 빈센트의 기만, 이미 벌어졌고 앞으로 몇 생애에 걸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책임감에 빈센트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이 시점부터 두 불멸자의 돌이킬 수 없는 잔혹하고 치열한 싸움이 시작된다. 그리고 6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이야기의 끝에 편지로 시작해 편지로 끝을 맺는 이 소설의 마지막 한 줄은 편지를 읽는 이에게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복수로써 소름 돋는 충격을 남긴다.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퀀텀 미러가 펼쳐 보여야 했을 과거와 현재, 미래의 무수한 비밀 대신 펼쳐지는 치밀하고도 잔인하며 진심 어린 애정마저 깃든 달콤한 기만의 역사를.

눈앞이 새하얘지는 분노와 함께 번개처럼 뇌리를 파고드는 미칠 것 같은 공포를.

받아들일 새도 없이 찾아오는 자신의 종말을.


선형적인 삶을 사는 우리는 책을 통해 살 수 없는 삶을 살고, 느낄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그 체험을 통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상황을 이해하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타인을 이해하며, 과거의 현재와 미래의 세상을 이해하는 법을 배운다. 소설이라는 허구의 이야기는 삶의 어떤 순간을 포착하여 전혀 다른 모습으로 비춰 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현실에서도 우리의 세계는 끝나고 있고, 수많은 세대를 거쳐 과거로부터 전해졌고 미래로 전해지는 속삭임이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 그리고 이 메시지는 현실이 되었다. AI라는 유례없이 진보된 기술의 도래 앞에서 <전체주의의 기원>을 집어 들게 되는 날이 오고야 말았으니까.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해도 잠시 발을 멈추고 노인이 길을 건너는 걸 도와줄 선함이 없다면, 기계에 예속될 뿐이라면, 지속될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진보의 이름으로 우리는 우리 영혼을 다 삼켜버렸고 이제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렸어.


정말로 세계가 끝나고 있다. 우리에게는 단 하나뿐인 세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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