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걸까
설은아 지음 / 수오서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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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때 대단한 착각 속에 빠져 살았다. 주변 사람들 중에서 내가 제일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반짝거리고 행복해 보이는데 나만 초라하고 부족해 보였다. 저 사람들의 인생이 장밋빛이라면 나는 흐리디흐린 잿빛인 것만 같았다. 무색인 것보다야 낫겠지만 왜 내 인생은 한 번을 핑크빛으로 물들지 않는지. 굳이 연애나 사랑이 아니더라도 흐린 하늘을 비집고 나오는 햇살처럼 은은하게라도 빛날 수 없나? 사람이 모두 죄를 짓고 그 벌을 받는다면 왜 그 벌을 나만 받는 거지? 스스로 끝없이 자문해 보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답이었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정말로 그랬다. 어느 순간부터 여러 친구와 지인들을 사귀고 아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삶 속으로 들어오는 이야기도 늘어났다. 그리고 그 사람들과 가까워지면서 나를 갉아먹던 감정이 나만 겪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줄곧 내 이야기만 하길 바랐었는데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저 사람'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행복하면 다행이지만 혹시 너도 힘들지 않았니? 속으로만 질문을 던질 때 그 사람의 삶이 나에게 찾아왔던 것 같다.

그건 어떻게 보면 발신과 수신이었다.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나는 무작정 말을 쏟아내기보다는 먼저 전화를 걸고 그 사람의 속을 듣는 법을 배우게 됐다. 굳이 세세하게 얘기를 듣진 못해도 '발신' 하나만으로 상대에게 위로가 되기도 한다. 이 책에 나오는 전화기가 그 역할을 해준 게 아닐까 싶다.

이곳에 담긴 솔직함들이 좋았다. SNS로만 볼 수 있었던 먼 타인의 삶이 성큼 다가온 기분이었다. 거짓말 안 하고 너무 마음이 아프고 공감이 가서 페이지를 넘기다 말고 울기도 했다. 이 사람들도 참 힘들게 살았네. 고생 많이 했네. 힘들었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평범하다는 것이 그렇게 나는 부럽더라. -61,235번째 통화

수능을 마친 고3이에요. 근데 결과가 좋지 않아서 지금까지 해왔던 게 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서 무서워요. 정말 이 악물고 버텼는데, 결과가 좋지 않아서 힘드네요. 누군가가 이걸 듣는다면 제가 듣지 못해도 괜찮다고 한마디 해주세요. 그 한마디가 듣고 싶은데 아무도 해주지 않네요.-42,700번째 통화

아무도 해주지 않은 말이었지만,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기에 여기에 남깁니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고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요. 누군가가 당신 옆에 있다는 걸 알아주세요. -28,638번째 통화

누가 먼저 나한테 괜찮냐고 물어봐줬으면 좋겠다. 괜찮다고 답해도 끈질기게 물어봐주면 좋겠다.-92,291번째 통화

사랑합니다. 오늘도 수고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고생하셨습니다.-67,223번째 통화

퇴사해도 나는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딸이죠? -75,114번째 통화

그냥 나에게 미안해. 정말 미안해. -76,550번째 통화

혼자 밥 먹느라 수고했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느라 수고했어. -28,809번째 통화

그냥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 못한다고 해도 다 하고 살 수 있어. 나는 그렇게 될 거야. 시간이 오래 걸려도 상관없어. 내가 하고 싶은 건 하고 살 거야. 열심히 살 거야. -11,880번째 통화

높이가 아니라 멀리 가고 싶어. -69,063번 째

인용하는데도 눈물 줄줄이다ㅠㅠ 진짜 이 책 읽으면서 많이 울었다. 공감이 이런 거구나 하고 다시 배운 계기가 되었다. 인용한 문구 중에는 내 마음 같은 게 있고,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 있었고,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42,700번째 통화에게. 저도 수능 결과가 예상보다 많이 좋지 않았어요. 수포자여서 타 과목 성적이 좋아야 했는데 그 과목마저 망한 것 같았거든요. 누구도 위로해줄 수 없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지는 기분이어서 그 마음이 뭔지 알 것 같습니다. 고생 많았습니다. 어떻게든 길은 생기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괜찮아요. 다 잘 될 거예요. 수능 본 지 벌써 1N년이 다 되어가지만 잘 살고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고기를 먹으러 가기로 했어요.

발신.

이 글이 어떤 수신자에게 닿을진 모르겠지만 음성사서함으로 남깁니다.

고생 많았고, 잘했어요.

고생 많았습니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 ᴗ ❛.)

#수오서재 #세상의끝과부재중통화 #설은아 #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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