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4월
평점 :
품절



소설에서 ‘여자 주인공 원톱 체제’는 흔하지 않다. 추리 같은 경우 절대적으로 남자주인공(형사나 탐정)이 극을 이끄는 경우가 많고, 로맨스는 두 남녀주인공 투톱 체제에 여러 서브 주인공들이 등장하곤 한다. 반면에 ‘파과’는 오로지 ‘조각’만이 주인공이다.

흔히 킬러하면 어떤 이미지일까? 영화 ‘콜롬비아나’의 ‘조 샐다나(카탈리아 역)’? 아니면 ‘존 윅’의 ‘키아누 리브스(존 윅 역)’? 아마 사람마다 떠올리는 ‘킬러’의 이미지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젊고 타인보다 신체적 능력이 우월하다는 부분에 있어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구병모 작가의 ‘파과’는 젊지도, 그렇다고 해서 이제 다른 동종 업자보다 엄청나게 우월하지만도 않은 한 킬러가 등장한다. 바로 40여 년간 청부 살인을 해온 60대 여성 킬러 ‘조각(爪角)’이다.

더 이상 청부 살인을 업으로 삼기에는 몸이 따라주지 않고 그렇다고 그만두기엔 결심이 따라주지 않는 언젠가. 그녀의 삶은 갑자기 큰 사건이 터진다거나 비극이 닥쳐와서가 아닌 그녀가 애써 부수려고 했던 작은 조각들로 인해 달라진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이 한 치의 여유로움도 허락하지 않고 내달려버린 세월 때문인가 생각한다.

그녀의 삶에는 깊게 스쳐지나간 사람이 몇 되지 않지만 결코 그녀가 잊을 수 없는 사람이 과거에 한명, 현재에 한명 존재한다. 바로 그녀의 첫사랑이자 스승인 ‘류’와 그녀가 ‘류’ 떠올리게 만든 ‘강 의사’이다. 류는 그녀의 내면에서 불쑥불쑥 등장한다.



하지만 말이다. 쥐나 벌레를 잡아주는 대가로 모은 돈을, 나중에 내가 쥐나 벌레만도 못하게 되었을 때 그런대로 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닌 것 같구나.

그녀를 능력 있는 킬러로 만든 류는 지금도 여전히 그녀의 정신적 지주이다. 그를 흔든 것이 ‘강 의사’이다. 차이가 있다면 류는 그녀가 킬러가 되도록 도와준 인물이라면 강 의사는 그녀가 사람을 살리고 싶게 만들었다는 것. 그녀는 강 의사 주변을 교묘하게 맴돌면서 내면의 변화를 알아차린다. 그의 부모가 파는 과일을 사가고 그의 딸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과거라면 일어나지 않을, 고요하면서도 소란스러운 파동이었다.

그녀에게 아마 큰 욕심은 없었을 것이다. 종종 과일가게에 들리고 멀리서 강 의사를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을 것이다. 문제는 이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그녀와 같은 에이전시에서 근무하는 ‘투우’라는 자였다.

그는 오래 전 일일 가정주부로 위장한 조각에 의해 아버지를 잃었는데, 그녀가 일하고 있는 에이전시에 들어가게 된 것은 복수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심리는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은 여자가 다른 누군가에게 휘둘려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는 것이 싫다’로 보이는데, 그녀에게 시비를 걸거나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모습은 장난기가 어려 있으면서도 묘하게 매달리는 듯한 느낌을 풍긴다. 그건 그의 기억 속에 조각이 살인자로서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약을 못 씹는 그를 신경써주는 등, 삭막한 가정에서 그에게 유일하게 따뜻한 온기를 남긴 여인이기도 해서이다. 그래서 이야기 끝에 가면 그녀에게 자신을 기억하냐고 묻는 것도 이런 잔상 때문으로, 조각을 향한 투우의 감정은 간단하게 ‘이렇다’하고 정의내리기가 힘들다. 그의 끝을 확인하고 나면 더더욱 그렇다.

투우에 의해 소박한 행복마저 사라진 뒤로 그녀는 다시 혼자가 되었으나 결코 쓰라리지만은 않은 ‘평소’를 맞이하게 되었다. 킬러인 그녀가 처음으로 ‘산 것’을 집에 들인, 그녀의 집에 살던 유기견 ‘무용’도 무지개다리를 건넜고 그 쓸쓸함을 달래고자 다시 과일가게를 방문하거나 강 의사를 만나러 갈 수도 없지만 그녀는 다시 ‘살게’ 되었다.

그녀가 결말 부분에서 줄곧 시도를 할까 주저하던 ‘네일 아트’를 받는 장면은 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던 이와 만날 수 없게 됐지만, 더 이상 누군가를 의식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상실을 받아들인다는 의미하기에 기억에 남는 부분이다. 짧게 머물다갈 아름다움이 그녀의 손톱 안에서 빛나고 있었다.

이 순간 그녀는 깨지고 상하고 뒤틀린 자신의 손톱 위에 얹어놓은 이 작품이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며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이 소설을 맛으로 표현하자면 담백하고 쓰다. 문장의 호흡이 길지만 거추장스럽지 않다. 이야기에는 쓴맛이 나지만 뱉고 싶지 않은 맛이다. 무료로 제공받은 책이지만 돈 주고 샀더라도 아깝지 않았을 책. 알라딘에 중고로 팔지 않을 책.

지금이야말로 모든 상실을 살아야할 때. 이 한마디가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마치 문신처럼, 부술 수 없는 조각처럼.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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