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 문청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질투에서였다. 문학소녀였던 내짝은 얼굴도 예쁜데다가 소도시에서 문학천재라는 말까지 들었고 성적도 꽤 좋은 편이었다. 그런 아이에게서 빼앗을 수 있었던 것이 등수와 많은 수의 책을 읽는 거였지만, 외우는 고등학교 공부만큼 쉬운 것도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문청의 길은 왜 이렇게 지난한 걸까. 걸어도 제자리걸음. 문학을 바라보는 눈은 나아지지 않고 - 일학년때와 비교해보면 간발의 차이는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간혹 그때가 더 날카로웠던 같다. 아무튼 내 짝꿍이 가장 좋아하던 소설이 『좀머씨 이야기』였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것은 무슨 심보일까. 『향수』는  밀란 쿤데라의 동명소설 - 번역에 의해서 같다는 것이지 원작의 외연과 내연은 크나큰 차이가 있다. -  을 읽은 적이 있을 뿐이고, 영화화된 작품을 본 적이 있는데 후각이 뛰어난 남자의 기구한 생이 참 인상깊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왠지 폴 오스터의 『빵굽는 타자기』가 생각났지만, 그 연관성을 찾지 못하는 것은 '문학적 건망증' 때문일 것이다. 

* 문학적 건망증  

새해를 시작하기 전에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다. 일학년 때는 선배들을 따라한다고 블로그에 많은 글들을 썼다. 200편이 넘는 서평을 쓰고 난 뒤부터 나름 작품을 볼 줄 아는 눈이 생겼거니 태만을 했던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을 보고 난 뒤에는 휘발성의 고민들만 남았다. 남았다고도 할수 없는.  <작가들이 무엇을 어떻게 썼는가?> 그것을 분석하고 고민하는 것이 올해 나에게 주어진 과제다. 얼마 전에는 김경주의 시를 읽으면서 그랬고, 오늘은 김행숙의 글을 읽으면서 그랬다. 자꾸 그랬으면 좋겠다. 이것이 문학적 건망증을 이겨내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그 순간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비탄이 나를 사로잡는다. 문학의 건망증, 문학적으로 기억력이 완전히 감퇴하는 고질병이 다시 도진 것이다. 그러자 깨달으려는 모든 노력, 아니 모든 노력 그 자체가 헛되다는 데서 오는 체념의 파고가 휘몰아친다.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기억의 그림자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도대체 왜 글을 읽는단 말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다음, 

<그러나 혹시 - 스스로를 위안하기 위해 이렇게 생각해 본다 - (인생에서처럼) 책을 읽을 때에도 인생항로의 변경이나 돌연한 변화가 그리 멀리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보다 독서는 서서히 스며드는 활동일 수도 있다. 의식 깊이 빨려 들긴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용해되기 때문에 과정을 몸으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라고 변명일 수도 있는 정답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콩나물 시루의 탄생을 믿으며, 히라노 게이치로의 독서법을 까먹지 말자.^^

* 깊이에의 강요 

예술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깊이'에 대한 고민이 있다. 그러나 그 '깊이'라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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