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는 특별한 것과 평범한 것이 모두 필요하다
이나가키 에미코 지음, 김미형 옮김 / 엘리 / 2021년 2월
평점 :
절판


이나가키 에미코, <인생에는 특별한 것과 평범한 것이 모두 필요하다>

어쩌면 여행은 보고 듣고 배우러 가는 것이 아니라, 단단하게 발딛고 있던 '나'를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종의 새로 태어나기일 것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변할 수 없는 끈질긴 일상에서 벗어나려면, 그래서 은근 큰 결심이 필요하다.

십여 년 간의 회사생활을 그만두려 결심했을 때 처음 내가 했던 일은 항공권을 끊는 일이었다. (그리고 퇴사 날까지 회사에서 여행지와 맛집과 호텔을 무한검색한 것은, 이제는 안 비밀이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거쳐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땅에 홀로 훌쩍 발을 디뎠을 때, 비록 스마트폰과 카드 한 장이면 어디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글로벌 세계라지만, 나는 두려웠다. 후련함보다는 당장 오늘 저녁 어떻게 주문하지, 숙소는 잘 찾아갈 수 있을까, 가게에서 '당당하고 스마트하게' 쇼핑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현지인처럼.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더듬거리는 불어와 영어를 섞어 대화를 시도해 보아도 그곳에서는 관광객, 아니면 이방인일 뿐이었다. 그걸 인정해야 했다. 아무것도 아닌 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나.

그러자 그곳에서의 '일상'이 편안해졌다. 유창하지 않아도 말도 안되는 문법으로 불어 단어를 던지면 신기하게도 미소(와 엄청난 불어로) 답해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두세번쯤 들른 카페의 공기가 문득 편안해지는 순간, 어디서든 살아갈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그 후 나는 그 전과는 다르게, 그렇지만 내 모습 그대로 살아가고 있다.

<인생에는 특별한 것과 평범한 것이 모두 필요하다>의 저자 이나가키 에미코는 동경하는 '외국살이'를 하고싶어 오십줄에 당차게 퇴사를 해버리고 프랑스 리옹으로 '셀프 특파'를 해버리는 당찬(!) 53세의 전직 신문 기자다. 멋진 외국 생활을 살아보겠어! 하고 결심하지만 실은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채 속옷 두벌과 쌀과 조미료, 바느질감과 참기름(?)만이 든 캐리어를 달랑 끌고 도착한 어영부영 외국살이는 그때의 나를 꼭 닮았다. '일상'을 제대로 살아보기로 결심하고 주뼛거리며 동네 시장에서 장을 보는 아침, 그 나라에 스며들기 위해 더듬더듬 동네 시장에서 감자와 꽃과 빵을 사고, 에어비앤비에서 요리를 하고, 동네 카페 직원과 조금씩 말을 주고받고, 두근두근하거나 은근히 신경을 쓰며 그들의 삶에 스미려 애쓰는 일상. 그 부단한 노력이 소소하고 재미있고 또 쓸쓸해서 마음이 간다.

그 좌충우돌 일상과 아무도 미소지어 주지 않는 쓸쓸함 속에서도 에미코는 최대한 전기를 쓰지 않고, 소비를 줄이고, 나를 찾아주는 이들에게 감사하며 일을 하는 평소의 소소한 습관이 일상을 유지하는 삶을 유지한다. 언뜻 무미건조해 보이지만 매일, 변함없는 간소한 삶. '무미건조한 게 어때서. 오히려 그게 포인트다.'

낯선 곳의 조그마한 일부라도 나의 공간으로 만드는 노력, 요리를 하고 요가를 하고 글을 쓰며 세계 어디서든 변하지 않는 '나'의 일상을 단단하게 만들어 가는 에미코의 14일간의 짧은 외국살이는 돌아왔을 때 빛을 발했다. 언제 어디서든 '나라는 존재'가 가능함을 알게 해 준 시간. 나의 퇴사 후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비로소 이곳에서 다시 살고, 또 떠날 수 있다. 작은 확신을 갖고, 어디서든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단단한 믿음을 갖고.

덧. 책을 덮고 나면 책 표지의 소소한 일러스트가 하나하나 에피소드와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애잔하기도, 슬며시 미소가 지어지기도, 고개를 끄덕이게도 하는 일상의 사물들에 담긴 작은 비밀을 들여다보는 재미!

📕책 속 한 줄
✏️필요한 건 외국어 능력도 아니고 정보도 아니고 연줄도 아니고 돈도 아닌, 바로 '나'였다. 별 볼 일 없는 나, 한심한 나. 지구 끝까지 간다고 그런 내가 완전히 달라질 이 없다. 평소에 하지 않던 것을, 여행을 갔다고 해서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걸 인정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디를 가든, 평소에 하던 걸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이다.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 쉬운 일이 사실, 어렵다. 그게 여행일 것이다. 내 나라에 있을 땐 아무 생각 없이 무의식적으로 하던 일인데 국경을 넘어선 순간 '무의식적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게 잘 안 되는 것투성이다. 그런데 허우적대다 보면, 나의 뿌리 같은 게 보인다. 정말로 내가 원하는 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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