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애는 머리가 나쁘니까
히메노 가오루코 지음, 정수란 옮김 / 연우출판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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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성범죄가 보도되면 대중은 성적인 부분을 알고자 한다. 피해자가 어떤 성폭력을 당했는지 그 내용이 궁금하다고. 보도나 비판이니 공론화니 하는 명분을 얻어 무자비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프로그램과 기사가 양산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 도쿄대에서 일어났던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소설의 첫머리이다. 어쩐지 익숙하지 않은가? 일본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킨 이 소설의 내용은 그래서 지금, 우리나라로 배경만 바꾸어도 될 정도로 전혀 낯설지 않다.

실제 사건에 기반한 이 책은 사실을 고발하거나 수위를 높여 사건을 상세히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시간을 들여 가해자와 피해자의 마음에 '이미' 자리한 사건을 들여다본다. 일상적인 만남과 문자, 서로 엇갈리거나 두근두근하며 마주치는 마음들이 이어진다.

하지만 여기에 폭력과 불순함과 남을 짓밟는 마음과 계급이 들어서는 것은 순식간이다. 도쿄대생이라는 우월함이 스멀스멀 스며들어 '나는 우월하니까. 나는 원하는 걸 가질 수 있으니까, 그럴 자격이 되니까, 저 여자애는 머리가 나쁘니까, 내가 아무렇게나 다뤄도 되니까' 라고 변질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나 극적인 사고 전환이 필요하지는 않다. 그저 그렇게 되어버린다. 대학 순위대로 매겨지는 이름과 가치는 그대로 사람의 가치로 호명된다.

미사키와 쓰바사가 처음 만나고 알게 되어가는 과정은 마치 연애소설이나 성장소설처럼 일상적이고 섬세하게 수놓인다. 그리고 그 사이에 아무렇지 않게 불쑥, 사건들이 놓인다. 여자애가 원한 거라며 동영상을 찍어 올리고 돈을 받는 일상은 일상처럼 한 페이지로 스윽 지나갈 뿐이다. 그 속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라인 메시지와 대화들은 오히려 불길할 정도로 평화롭고 나른하다.

그리고 사건 당일도 마찬가지이다. 평소처럼 우연히 아는 사람과 모임에 나가고 맥주 한 잔을 한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과 말투 하나하나는 이후 법정이서 진술의 재료가 된다. 사건 이후 소설은 건조하고 담담하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사건과 그에 이어지는 반응들. 사람들은 댓글로 피해자의 행실을 비난하고 꽃뱀으로 몰고, 가여운 도쿄대생들의 앞날을 막았다고 비난한다. 가해자들은 '완전히' 불기소되어 (퇴학 처분을 받은 후에도) 가정의 후광을 입고 그럭저럭 살아 나간다. 하지만 끝까지, 그날의 사건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날, 그 애 왜 그렇게 울었을까? 쓰바사는 알지 못했다."

사건이 일어나는 지점부터 소설은 오히려 기사나 다큐처럼 건조하다. 사건은 이전에 묘사된 미사키의 마음, 수많은 라인 문자와 대화, 편지들의 감정에 묻힌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히 '사건 이전'으로 돌아간다. 술자리에서 쓰바사를 위해 억지로 웃어 주었던, 엄청난 상황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던, 평소보다 다 위악적인 폭력을 저질렀던 그들에게 내재된 마음으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상황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그저 '왜 그랬어'라는 무수한 질문을 남긴다.

그리고, 사건은 되풀이된다. 일본에서도, 여기 한국에서도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름만 바뀐 채 같은 사건과 같은 판결, 같은 언론과 대중의 반응이 되풀이된다. 거기서 피해자와 가해자는 지워지고, 그들의 삶은 밀려난다. 소설 속에서, 사건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쌓여왔던 이야기와 마음들은 의미없이 사라진다. 그들에게는 한 장의 판결문만이 남는다. 그 속에서 우리는 '그 애, 왜 그랬을까?'를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이해하려는 노력이라도 해 보았을까? 크고 작은 비슷한 상황이 수없이 이어지는 이곳에서, 우리는 다르게 반응할 수 있을까? 그녀와 나와 우리의 삶을 위한 질문을 이제 우리에게 되돌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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