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가 도입될 당시 한국 사람들에게 다수 응모자의 문예 창작 능력을 누군가 하나의 잣대로 평가할 수 있으며, 심지어 가장 뛰어난 작품이 무엇인지 가릴 수도 있다. 라는 개념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고려와 조선 시대 과거제도의 상당 부분은 작문이었다. - P99

사회 개혁에 대한 논의가 없지는 않았으나, 그 방향은 대부분 옛 성현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이었다. 복고적이고 근본주의적이었다. 오히려 그런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과거제를 통해 유무형의 권력을 더 쥐게 되었다. 다른 종류의 지식인들은 ‘못 배운 것들‘ 이라고 간단히 정리되었다. 그렇게 성리학 엘리트들이 조선 후기의 여러 가지 가능성을 봉쇄했다. 사회는 점점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을 잃었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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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백화점 앞 횡단보도를 건너며 생각했다. 인간은 큰 사건 몇 개를 던져 주면 자동적으로 그 사건들을 잇는 이야기를 만드는 오류를 저지르곤 한다. 별 몇 개를 이어 큰곰이니 물병이니 하는 보이지 않는 그림을 밤하늘에 그리듯, 사건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 인과관계를 만들어 낸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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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다행인 것은, 이 세스템을 중립적으로 평가하기란 어느 누구에게도 가능하지가 않다는 점이다. 객관적인 입장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취재는 살인 사건이나 비리 의혹을 조사하는 것과는 다르다. 사건 취재가 아니라 시스템 취재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시스템 안에 있으니까, 외부의 시선이란 게 존재할 수 없는 거다. 대졸자에게는 대졸자의 입장이, 고졸자에게는 고졸자의장이 있다. 한쪽 의견이 은근한 우월감과 시스템이 정당하다고 믿고픈 기대에 휘둘릴 수 있다면, 다른 쪽 의견은 피해 의식으로 왜곡될 수 있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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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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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와 시대를 통과해 과거의 이야기가 현재에게 영향을 미쳐 미래를 바꿀, 소중한 자매애를 속삭이는 이야기.

내가 지금의 나이면서 세 살의 나이기도 하고, 열일곱 살의 나이기도 하다는 것도, 나는 나를 너무 쉽게 버렸지만 내게서 버려진 나는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그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관심을 바라면서, 누구도 아닌 나에게 위로받기를 원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종종 눈을 감고 어린 언니와 나를 만난다. 그애들의 손을 잡아보기도 하고 해가 지는 놀이터 벤치에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학교에 갈 채비를 하던 열 살의 나에게도, 철봉에 매달려 울음을 참던 중학생의 나에게도, 내 몸을 해치고 싶은 충동과 싸우던 스무 살의 나에게도, 나를 함부로 대하는 배우자를 용인했던 나와 그런 나를 용서할 수 없어 스스로를 공격하기 바빴던 나에게도 다가가서 귀를 기울인다. 나야. 듣고 있어. 오래 하고 싶었던 말을 해줘. -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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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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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희자 아바이를 생각하면 그게 나았을지도 몰라. 차라리 순간이었으면 어땠을까. 그러면 희자 아바이가 이렇게 아플 일이 없었을 텐데. 그러면서두, 이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내 욕심이라고 욕해도 좋다. 희자 아바이 말고 내 위주로 생각한다고 욕해도 좋다. 그래두 난 희자 아바이가 살아 돌아오고, 그렇게 살아서 나랑 희자랑 같이 지냈던시간이 좋았더랬어. - P120

서럽다, 문득 생각하다가 삼천이 너가 했던 말이 생각났댔어. 방앗간 사장이 내한테 뭐라 지랄한 적 있지 않간. 내가 빨리빨리 일을 못한다구 몰아붙였던 적이 있었더랬잖아. 내가 집에 가는 길에 서럽다, 서럽다 하니 삼천이 너가 그랬지. 서럽다는 기 무슨 말이간. 슬프믄 슬프구 화가 나믄 화가 나지, 서럽다는 기 뭐야. 나 기 말 싫구만. 너레 화가 나믄 화가 난다고 말을 하라요. 나한테 기런 말두 못하믄 내가 너이 동문가. 그래서 마당에 앉아 내 가만히 생각해보니 서럽다는 말이 거짓 같았어. 서럽긴 뭐가 서럽나. 화가 나지. 삼천이 너가 그러지 않았어. 섧다, 섧다 하면서도 화도 한 번 내보지 못하구 속병 드는 거 아니라고. 그 말을 나 생각해. - P127

원자폭탄으로 그 많은 사람을 찢어 죽이고자 한 마음과 그 마음을 실행으로 옮긴 힘은 모두 인간에게서 나왔다. 나는 그들과 같은 인간이다. 별의 먼지로 만들어진 인간이 빚어내는 고통에 대해, 별의 먼지가 어떻게 배열되었기에 인간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해 가만히 생각했다. 언젠가 벌이었을, 그리고 언젠가는
초신성의 파편이었을 나의 몸을 만져보면서. 모든 것이 새삼스러웠다. - P130

인내심이 강한 성격이 내 장점이라고 생각했었다. 인내심 덕분에 내 능력보다도 더 많이 성취할 수 있었으니까. 왜 내 한계를 넘어서면서까지 인내하려고 했을까.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언제부터였을까. 삶이 누려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수행해야 할 일더미처럼 느껴진 것은. 삶이 천장까지 쌓인 어렵고 재미없는 문제집을 하나하나 풀어나가고, 오답 노트를 만들고, 시험을 치고, 점수를 받고, 다음 단계로 가는 서바이벌 게임으로 느껴진 것은. 나는 내 존재를 증명하지 않고 사는 법을 몰랐다. 어떤 성취로 증명되지 않는 나는 무가치한 쓰레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나를 절망하게 했고 그래서 과도하게 노력하게 만들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와 가치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 P156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을 겪은 사람 앞에서 나의 진실을 떠벌리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엄마의 고통 앞에서 나의 진실은 가치가 없었다. 어떤 경우에도 엄마의 불행에 나의 불행을 견줄 수 없었다. - P171

—너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영옥아. 우린 다시
만난다이. 내 기걸 알갔어. 기래 생각하니 슬프지도 않으나. 결국은 다시 만날 테니 말이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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