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가 도입될 당시 한국 사람들에게 다수 응모자의 문예 창작 능력을 누군가 하나의 잣대로 평가할 수 있으며, 심지어 가장 뛰어난 작품이 무엇인지 가릴 수도 있다. 라는 개념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고려와 조선 시대 과거제도의 상당 부분은 작문이었다. - P99

사회 개혁에 대한 논의가 없지는 않았으나, 그 방향은 대부분 옛 성현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이었다. 복고적이고 근본주의적이었다. 오히려 그런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과거제를 통해 유무형의 권력을 더 쥐게 되었다. 다른 종류의 지식인들은 ‘못 배운 것들‘ 이라고 간단히 정리되었다. 그렇게 성리학 엘리트들이 조선 후기의 여러 가지 가능성을 봉쇄했다. 사회는 점점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을 잃었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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