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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인생 - 김창현의 택시일기
김창현 지음 / 오마이북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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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정치인이 택시운전을 한 적이 과거 몇 번 있었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이는 박계동씨다. 한때 청문회 스타로 불렸던 그는 총선 낙선 뒤 2000년 전후로 택시운전을 했었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몇 년 뒤 다시 국회에 진입했다. 그 후 김문수가 택시 핸들을 이어받아 2008년부터 최근까지 40여회 일일기사로 택시운전을 하고 있다. 물론 김문수의 택시 운전은 도지사로서 민생체험이라는 이벤트성 행사라는 차이가 있다. 이 둘의 공통점은 모두 택시운전을 한 경험을 책으로 내었다는 점이다. 택시운전 경험은 별다른 읽을거리 없는 다른 정치인들의 저서와는 달리 좋은 이야깃거리이기도 하다. 그런 좋은 소재를 놓쳐서야 정치인일 수 없었을 것이다.

 

 택시운전은 생생한 밑바닥 여론을 접할 수 있어 정치인에게 매력적일지 모른다. 밀폐된 공간이므로 목적지에 가는 동안 대화 집중도도 매우 높다. 택시를 몰면 굉장히 다양한 사람을 자연스럽게 접하기에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꽤 많이 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얘기에서 민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정치인으로서의 의식발전에 활용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된다. 불행히도 안계동은 택시 운전 이후의 정치행보에서 그 전보다 오히려 퇴보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경험이 성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평범한 이치를 보여준다. 울산 동구청장을 역임한 김창현의 <달리는 인생>(오마이북, 2013)은 박계동과 김문수의 택시운전과는 또 어떻게 다를까?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 소속인 그의 택시는 보수정당인의 택시와는 아무래도 모습이 달랐다.

 

그의 책은 손님들의 소소한 일상 소개를 제외한다면, 택시노동의 열악성, 손님들의 노동의식과 정치적인 판단, 세대별 가치관과 정치관, 자영업 여건 등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정치의식을 직접 드러낸 부분이 아니더라도 몸에 밴 진보의식은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수의와 염은 하지 않았다. 이 또한 전통 장례 의식과 다른 내 방식이었다. 나는 그냥 평소 아버지가 즐겨 입던 양복과 넥타이, 구두를 신겨드리고 싶었다(144쪽).”는 글에서는 통상적인 관례를 벗어나고자 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들은 당연히 며느리 편이지. 아니 당연히 며느리의 남편이지. 시어미 당신이 선택해야 할 가장 올바른 길은 말이야. 그 사이에서 그냥 빠지는 거야. 무슨 중립은 중립이야?(137쪽)”라면서 양비론적인 어설픈 중립이 아니라 정확히 한쪽을 택했다. 젊은 세대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나름의 확고한 가치평가 기준을 보여줬다.

 

 지난 대선을 가로지른 세대별 투표의 영향 탓인지, 세대별 정치의식 차이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젊은 애들은 생각이 없으니까”라는 할머니의 정치관과, “왜 늙으면 투표하지 말라는 말이 나오는지 알 것 같아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 같아요. 그저 밥 주면 밥 먹는 사람들이 아니고서야.”라는 20대의 정치관은 별도로 소개되었지만, 세대별 정치의식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세대별 트랜드의 적확한 파악은 어느덧 정치인으로서의 필수적인 덕목이 된 듯 하다.

 

 많은 자영업자를 압박하는 대기업 할인매장에 대한 경계는 그의 정치적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더 큰 문제는 자영업자, 그러니까 영세 상인들을 살리자는 사회적 공감대가 희박하다는 것이다. 싸고 좋은 물건이 지역에 들어오면 나의 생활이 편리해진다는 의식이, 더불어 살아가는 협동 공동체 개념을 압도한다(106쪽).” 그럼에도, 마트에서 근무한다는 이유로, 기업에서 안정적인 월급을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드러나는 계급의식과 정치행동의 개별화에 대해서는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분명한 노동자 계급의식, 그리고 보수정당에 대한 지지, 이 존재와 의식의 분열은 주변에서 숱하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렇지만, 많은 부분에서 그는 정치인이라기 보다는 택시운전사로서의 본업에 충실했다. 나아가 택시를 이용하는 시민들의 아픔과 고민을 어루만지려는 시도가 상당수 눈에 띄었다. 유행어로 말한다면 그의 택시는 ‘힐링 택시’를 지향하는 듯하다. “확신이 없으면 결혼하지 않는 게 옳아요. 그 사람이 사는 방식, 가치관, 결혼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결혼을 꿈꾸지 않는 편이 좋죠. 결혼하고 바뀌는 사람은 잘 없어요(136쪽).” 20대 여자손님에게 한 이 조언은 나이 먹으면 쉽게 바뀌지 않는 평범한 진리를 담고 있다. 사람이 바뀌는 것은 굉장한 절박함을 느꼈을 때라야만 가능한데, 또 지속할 수 있는 굳건한 의지가 필요하기에 쉽지 않은 부분이다.

 

 그는 “대화의 기술은 바로 이런 것이다. 상대가 잘 아는 문제, 전문성 있는 문제를 질문하면 그는 아주 자신감 있게 대답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대화에 활기가 넘친다(224쪽).”고 했다. 공감과 감정이입을 넘어서고자 하는 김창현은 상대방을 선생님으로 인정하는 일종의 인터뷰식 대화를 종종 시도한 듯하다. 듣기보다는 말하기를 좋아하는게 정치인의 본성일진데, 그는 비로소 듣는 기술을 터득한 것 같다. 그것도 매우 요령있게. 김창현의 택시 성적을 정확히 평가하긴 힘들겠으나, 최소한 정치 택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책의 곳곳에서 승객들의 고민과 아픔을 함께 나누려는 모습이 적지 않게 느껴졌다.  그러한 경험에서 상당한 밑바닥 정서를 이해하고 깨우침을 얻은 듯 하다. 그의 택시가 언제까지 이어질 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택시운전이라는 힘든 노동의 경험이 그의 거듭남을 위한 좋은 자양분이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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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자크 랑시에르 지음, 허경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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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민주주의’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일반적인 사회규범이 되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공동의 선을 위한 최고의 가치로 추구된다. 그런데 현대의 상당수 지식인들은 민주주의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 물론 제도 그 자체를 싸잡아 통째 비판하는 경우는 잘 없다. 다만, 근대적 대중사회 속 개인들의 무제한적 욕구를 사회문제의 원인으로 지적하며 이로 인한 혼란상을 우려한다. 사실상 민주주의 체제에 그 원인을 돌리고 있는 셈이다. 랑시에르는 그 대척점에서 특히 최근 두드러지고 있는 새로운 증오의 양상을 분석하고 그 문제점 도출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는 먼저 민주주의가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 나타났을 때 그것은 ‘질서 파괴’를 의미하는 부정적인 용어였음을 전제 한 후, 오늘날에도 민주주의의 전파에는 ‘혼란’도 같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 원인으로써 권위 실종, 보수적 가치와 같은 기존 원칙에 대한 불복종, 공익 실현을 위한 희생에의 무관심 등을 들었다. 이렇게 유발되는 문제점을 민주주의 범죄로 분류한 후 그 원인을 목자(牧者: 지도자) 부재의 민주주의 시스템 때문이라 보고, 근대 민주주의 출현 이전의 통치형태를 선한 통치로 봐야 한다는 것이 바로 랑시에르가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밀네르(Milner)와 레비(Levy) 등 민주주의 비판론자들의 견해이다.

 

플라톤은 <The republic>에서 민주주의의 비천한 모습들을 제시한다. 랑시에르는 실제 그 내용이 오늘날의 우리 모습과 비슷하다고 평가하며 민주주의 비판의 역사적 근원을 보여준다. 이렇게 민주주의 비판의 역사도 민주주의의 역사만큼이나 그 뿌리가 깊다. 그러한 시각의 주체는 철인정치와 접목되는 것이 엘리트주의나 전문가주의이니 만큼 결국 지식인 집단의 내부에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랑시에르는 “우리는 다수의 횡포, 정치가의 우둔함, 그리고 소비지향적 개인들의 경박함을 비난하면서 그것을 이유로 해서 인민의 권력을 제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정치 자체를 포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고 말한다(p.106). 그러면서 그는 ‘추첨(우연성)’을 내세운다. 즉, 민주주의 정치는 아무나의 정치이며, 정치적인 참여에는 아무런 자격이 필요하지 않기에 ‘추첨’을 민주주의 본질이라고 강조한다.

 

대의제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2012년 대선의 안철수가 떠오른다. 안철수는 당시 으뜸 얘깃거리였다. 의사, 벤처기업가, 대학교수라는 여러 영역을 넘나든 그의 이력만큼이나 다양한 반응들이 쏟아졌다. 그는 기성 정치인들의 진부하고 상투적인 행위와 언어에 실망한 이들을 단박에 휘어잡았다. 수시로 여신 디케의 저울대에 오르내리는 기업인들과 그들의 불가사리 기업들 속에서 빼어난 기술력으로 사회적 기업을 지향한 안철수 연구소는 남달랐기 때문이다. 사실 능력과 인성의 결합은 언제나 환상적이다. 어쩌면 장사꾼 이상의 무엇을 끝내 보여주지 못한 MB에 대한 실망이 안철수의 주가를 더욱 더 끌어올렸는지 모른다. 그러한 이가 좀 더 큰일을 해야 하고, 또 잘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어찌 보면 당연한 생각이리라.  반면, 자질은 인정하나 정치는 기업이나 대학과는 그 영역이 다르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정치는 정치인에게 맞기고 지금까지 잘해 온 기업활동에 몰두하는 것이 자기 역할에 맞고 사회적으로도 더 이익이라는 시각이었다. 정치는 직업정치인이, 기업은 전문경영인이, 학생은 학업에 열중하는, 각자 자기 분야에서 자기 역할에 충실한 것이 좋다는 논리이다. 매우 기능적인 관점이지만 얼핏 합리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근데, 정치적인 자질 검증이 충분치 않았다는 말은 일견 공감이 가나, 다른 일을 잘 해왔으니 계속 그 일이나 신경 쓰라는 시각은 맞는 것일까?

 

랑시에르의 대의제에 대한 생각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런 논리는 정치체계로 본다면 대의제이고, 전문가주의적인 시각이다. 각 분야에 가장 정통한 전문가가 있는 법이니 일반인은 조용히 각자의 삶에 충실하라는 식이다. 그 전문가들이 각자를 대신해서 그 영역을 이끌어 나가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대의제는 사실상 오늘날 많은 사회에서 현실적으로 힘든 직접민주주의를 대신한다. 그런데 랑시에르는 오히려 대의제가 사실은 민주주의와 정반대의 것이라고 평가 절하한다. 미국 독립사에서 민(民)의 이름으로 엘리트들이 권력을 행사한 수단이었다고 꼬집기도 한다. 사적영역과 공적영역 각각의 의미와 비교를 통해 대의제가 개인의 공적영역을 부실하게 만들고 사적영역에만 빠지게 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즉, 정치는 직업정치인에게 맡기고 일반인은 가정과 직장에 충실하라는 논리로 귀결될 수 있는데, 이것이 결국 시민을 소비자 혹은 구경꾼으로 변질시킨다는 우려일 것이다. 이러한 과두제 주장은 그 이면에 실은 경제 과두제의 지배를 숨기고 있다고 지적함으로써 지식자본과 경제자본의 결합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대의제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구체적인 방식을 제시하기도 한다. 선출된 의원 임기의 최소화, 겸직 금지 및 재선 금지, 국회의원들만에 의한 법제정, 국가 공무원에게 국회의원을 위한 피선거권 금지, 선거운동과 선기비용의 최소화 및 선거과정에서 경제세력들에 대한 개입통제 등이다(p.155). 최악의 정부형태를 피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인데, 그가 말하는 최악의 정부란 권력만을 지향하면서 권력을 장악하는 데 능숙한 그런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정부를 의미한다. 그는 결국 오늘날 민주주의가 겪고 있는 위기는 민주주의 제도나 지나치게 방종적인 시민들에게 있지 않고, 소수 지배자들의 게걸스러운 탐욕 때문으로 분석했다.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에서 살고 있지 않”고 오히려 “과두제적 법치국가 속에서” 살고 있다는 그의 해석은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아쉬움이 담겨있다.

 

한국 사회에서도 많이 사용되는 포퓰리즘이란 용어에 대한 민주주의적 측면에서의 해석은 흥미로왔다. 그가 본 포퓰리즘은 민중적 정당성과 과두제적 정당성 사이의 악화된 모순을 은폐시키는 용어였다. 그 용어 사용의 뒷면에 바로 자본과 지식과의 동맹이 있다는 해석이다. 사실 이 용어는 이성적인 논의를 중단시키고 논리를 뭉개버린다. 자신은 수준이 다르다는 엘리트의식을 은근슬쩍 드러내며 대중을 우민으로 여기는 생각이 깔려있다. 바로 전문가주의적 용어로 볼 수 있다. 랑시에르는 포퓰리즘은 결국 과두제에 의한 인민 없는 통치, 정치 없는 통치의 염원을 드러내는 용어임을 강조했다.

 

랑시에르는 시종일관 권력에 대한 욕심만을 가진 소수 정치집단의 탐욕 방지와 지식과 자본의 결합에 의한 더 큰 인간소외를 걱정하고 있다. 그의 민주주의는 매우 이상적이다. 그로 인해 생길 수 있는 혼란마저도 감수해야 한다는 논조에서는 근본주의적 시각마저 느껴진다. 신자유주의가 지식자본과 연결될 때 초래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고하고 있다. 두 집단은 각각의 영역에서 전문가요 엘리트 집단으로서, 근대 이전으로 본다면 결국 소수의 시민권자요 정치참여자일 것이다. 기술과 매체의 발달에 힘입어 최근 직접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부쩍 높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직접 민주주의는 많은 현실적인 한계를 가진다. 특히 사회 하위계층은 노동과 생계의 압박으로 여전히 정치 소외지대에 있다. 직접 민주주의를 위한 새로운 매체로 떠오르는 인터넷과 휴대폰 등도 결국 비용이 필요한 물질이기에 모두가 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직접 민주주의는 여전히 방법론적인 문제를 안고 있고, 그로 인해 아직도 우리 사회는 이상적인 정치체제가 아닌 차선의 정치체계에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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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만들기 - 20세기 미국에서의 좌파 사상 동문선 현대신서 32
리처드 로티 지음, 임옥희 옮김 / 동문선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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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신실용주의 철학자 Richard Rorty를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이미 2005년에 타계한 그는 미국 분석철학계의 거두로써 유럽에까지 그 이름을 떨친 철학자였다.  Rorty의 ‘미국 만들기’는 그의 대학 강연을 모은 것이고, 책두께도 얇은 편이어서 작가의 위상에 비해 읽기는 비교적 수월했다. 

 그는 처음부터 자기 논리의 기반을 19세기 미국의 세속주의 작가인 듀이와 휘트먼에 두고 글을 이끌어 갔다.  듀이와 휘트먼 역시 생소하나 미국인에겐 어느 정도 보편적인 인지도가 있는 작가들이라 한다.  아마도 그들의 '세속주의'가 로티의 '실용주의'와 상당부분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Rorty는 인종과 노동 분야에서 이룩한 미국의 전통적(개혁주의) 좌파의 활동상에 대해 처음부터 줄곧 무한한 애정을 나타냈다.  그러나 최근의 좌파에 대해서는 ‘문화 좌파’ 혹은 ‘강단 좌파’로 명명한 후 집요하리만큼 끈질기게 ‘실천성’ 부족을 나무라며 전통의 계승을 촉구했다.  그가 계속 비판하고 있는 '문화 좌파'에 최근 우리 사회에서 언급되고 있는 '강남 좌파'가 자꾸 오버랩된다.  아뭏던 그는 미국적인 애국심, 재분배주의 경제학, 반공주의 그리고 듀이류의 실용주의를 개혁주의 미국인 좌파의 전형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런데, 그가 늘상 강조하는 자문화 중심주의, 애국심의 고취, 긍정적인 역사해석 등은 모두 우파의 언어가 아니던가?  그러다가 강연 막바지에서는 다시 반권위주의, 노동권, 여권신장, 인권, 페미니즘, 게이인권을 거론한다.  이쯤 되면 이데올로기적 지형도에서 이 사람의 좌표점은 어디일지 매우 궁금해진다.  생전에도 그는 이러한 태도로 인해 좌우 양측에서 모두 공박을 받는 그러한 위치에 있었다 한다.  이런 혼돈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그가 천착한 ‘실용주의’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시장자본에 대한 태도가 진보주의의 척도임을 감안한다면, Rorty는 분명 진보주의자이다.  그는 전통적인 좌파와 문화적 좌파와의 사잇길을 내되 그 구심점을 제시하기 위해 이 강연을 준비한 것일까?  그의 실용주의는 미래 지향적이기에 미래로 가는 길을 가로 막는 것들을 걷어내고 싶어했는지 모른다.

강연의 말미에서 Rorty는 ‘단지 경제적이고 군사적인 거인‘이 아닌 ’품위 있고 교양 있는 사회‘ 로서의 미국을 다시 한번 염원함으로써 그의 지향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상당히 리버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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