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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자크 랑시에르 지음, 허경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민주주의’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일반적인 사회규범이 되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공동의 선을 위한 최고의 가치로 추구된다. 그런데 현대의 상당수 지식인들은 민주주의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 물론 제도 그 자체를 싸잡아 통째 비판하는 경우는 잘 없다. 다만, 근대적 대중사회 속 개인들의 무제한적 욕구를 사회문제의 원인으로 지적하며 이로 인한 혼란상을 우려한다. 사실상 민주주의 체제에 그 원인을 돌리고 있는 셈이다. 랑시에르는 그 대척점에서 특히 최근 두드러지고 있는 새로운 증오의 양상을 분석하고 그 문제점 도출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는 먼저 민주주의가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 나타났을 때 그것은 ‘질서 파괴’를 의미하는 부정적인 용어였음을 전제 한 후, 오늘날에도 민주주의의 전파에는 ‘혼란’도 같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 원인으로써 권위 실종, 보수적 가치와 같은 기존 원칙에 대한 불복종, 공익 실현을 위한 희생에의 무관심 등을 들었다. 이렇게 유발되는 문제점을 민주주의 범죄로 분류한 후 그 원인을 목자(牧者: 지도자) 부재의 민주주의 시스템 때문이라 보고, 근대 민주주의 출현 이전의 통치형태를 선한 통치로 봐야 한다는 것이 바로 랑시에르가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밀네르(Milner)와 레비(Levy) 등 민주주의 비판론자들의 견해이다.
플라톤은 <The republic>에서 민주주의의 비천한 모습들을 제시한다. 랑시에르는 실제 그 내용이 오늘날의 우리 모습과 비슷하다고 평가하며 민주주의 비판의 역사적 근원을 보여준다. 이렇게 민주주의 비판의 역사도 민주주의의 역사만큼이나 그 뿌리가 깊다. 그러한 시각의 주체는 철인정치와 접목되는 것이 엘리트주의나 전문가주의이니 만큼 결국 지식인 집단의 내부에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랑시에르는 “우리는 다수의 횡포, 정치가의 우둔함, 그리고 소비지향적 개인들의 경박함을 비난하면서 그것을 이유로 해서 인민의 권력을 제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정치 자체를 포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고 말한다(p.106). 그러면서 그는 ‘추첨(우연성)’을 내세운다. 즉, 민주주의 정치는 아무나의 정치이며, 정치적인 참여에는 아무런 자격이 필요하지 않기에 ‘추첨’을 민주주의 본질이라고 강조한다.
대의제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2012년 대선의 안철수가 떠오른다. 안철수는 당시 으뜸 얘깃거리였다. 의사, 벤처기업가, 대학교수라는 여러 영역을 넘나든 그의 이력만큼이나 다양한 반응들이 쏟아졌다. 그는 기성 정치인들의 진부하고 상투적인 행위와 언어에 실망한 이들을 단박에 휘어잡았다. 수시로 여신 디케의 저울대에 오르내리는 기업인들과 그들의 불가사리 기업들 속에서 빼어난 기술력으로 사회적 기업을 지향한 안철수 연구소는 남달랐기 때문이다. 사실 능력과 인성의 결합은 언제나 환상적이다. 어쩌면 장사꾼 이상의 무엇을 끝내 보여주지 못한 MB에 대한 실망이 안철수의 주가를 더욱 더 끌어올렸는지 모른다. 그러한 이가 좀 더 큰일을 해야 하고, 또 잘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어찌 보면 당연한 생각이리라. 반면, 자질은 인정하나 정치는 기업이나 대학과는 그 영역이 다르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정치는 정치인에게 맞기고 지금까지 잘해 온 기업활동에 몰두하는 것이 자기 역할에 맞고 사회적으로도 더 이익이라는 시각이었다. 정치는 직업정치인이, 기업은 전문경영인이, 학생은 학업에 열중하는, 각자 자기 분야에서 자기 역할에 충실한 것이 좋다는 논리이다. 매우 기능적인 관점이지만 얼핏 합리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근데, 정치적인 자질 검증이 충분치 않았다는 말은 일견 공감이 가나, 다른 일을 잘 해왔으니 계속 그 일이나 신경 쓰라는 시각은 맞는 것일까?
랑시에르의 대의제에 대한 생각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런 논리는 정치체계로 본다면 대의제이고, 전문가주의적인 시각이다. 각 분야에 가장 정통한 전문가가 있는 법이니 일반인은 조용히 각자의 삶에 충실하라는 식이다. 그 전문가들이 각자를 대신해서 그 영역을 이끌어 나가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대의제는 사실상 오늘날 많은 사회에서 현실적으로 힘든 직접민주주의를 대신한다. 그런데 랑시에르는 오히려 대의제가 사실은 민주주의와 정반대의 것이라고 평가 절하한다. 미국 독립사에서 민(民)의 이름으로 엘리트들이 권력을 행사한 수단이었다고 꼬집기도 한다. 사적영역과 공적영역 각각의 의미와 비교를 통해 대의제가 개인의 공적영역을 부실하게 만들고 사적영역에만 빠지게 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즉, 정치는 직업정치인에게 맡기고 일반인은 가정과 직장에 충실하라는 논리로 귀결될 수 있는데, 이것이 결국 시민을 소비자 혹은 구경꾼으로 변질시킨다는 우려일 것이다. 이러한 과두제 주장은 그 이면에 실은 경제 과두제의 지배를 숨기고 있다고 지적함으로써 지식자본과 경제자본의 결합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대의제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구체적인 방식을 제시하기도 한다. 선출된 의원 임기의 최소화, 겸직 금지 및 재선 금지, 국회의원들만에 의한 법제정, 국가 공무원에게 국회의원을 위한 피선거권 금지, 선거운동과 선기비용의 최소화 및 선거과정에서 경제세력들에 대한 개입통제 등이다(p.155). 최악의 정부형태를 피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인데, 그가 말하는 최악의 정부란 권력만을 지향하면서 권력을 장악하는 데 능숙한 그런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정부를 의미한다. 그는 결국 오늘날 민주주의가 겪고 있는 위기는 민주주의 제도나 지나치게 방종적인 시민들에게 있지 않고, 소수 지배자들의 게걸스러운 탐욕 때문으로 분석했다.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에서 살고 있지 않”고 오히려 “과두제적 법치국가 속에서” 살고 있다는 그의 해석은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아쉬움이 담겨있다.
한국 사회에서도 많이 사용되는 포퓰리즘이란 용어에 대한 민주주의적 측면에서의 해석은 흥미로왔다. 그가 본 포퓰리즘은 민중적 정당성과 과두제적 정당성 사이의 악화된 모순을 은폐시키는 용어였다. 그 용어 사용의 뒷면에 바로 자본과 지식과의 동맹이 있다는 해석이다. 사실 이 용어는 이성적인 논의를 중단시키고 논리를 뭉개버린다. 자신은 수준이 다르다는 엘리트의식을 은근슬쩍 드러내며 대중을 우민으로 여기는 생각이 깔려있다. 바로 전문가주의적 용어로 볼 수 있다. 랑시에르는 포퓰리즘은 결국 과두제에 의한 인민 없는 통치, 정치 없는 통치의 염원을 드러내는 용어임을 강조했다.
랑시에르는 시종일관 권력에 대한 욕심만을 가진 소수 정치집단의 탐욕 방지와 지식과 자본의 결합에 의한 더 큰 인간소외를 걱정하고 있다. 그의 민주주의는 매우 이상적이다. 그로 인해 생길 수 있는 혼란마저도 감수해야 한다는 논조에서는 근본주의적 시각마저 느껴진다. 신자유주의가 지식자본과 연결될 때 초래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고하고 있다. 두 집단은 각각의 영역에서 전문가요 엘리트 집단으로서, 근대 이전으로 본다면 결국 소수의 시민권자요 정치참여자일 것이다. 기술과 매체의 발달에 힘입어 최근 직접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부쩍 높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직접 민주주의는 많은 현실적인 한계를 가진다. 특히 사회 하위계층은 노동과 생계의 압박으로 여전히 정치 소외지대에 있다. 직접 민주주의를 위한 새로운 매체로 떠오르는 인터넷과 휴대폰 등도 결국 비용이 필요한 물질이기에 모두가 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직접 민주주의는 여전히 방법론적인 문제를 안고 있고, 그로 인해 아직도 우리 사회는 이상적인 정치체제가 아닌 차선의 정치체계에 머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