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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앙투안 드 생 텍쥐페리 지음, 최복현 옮김 / 책이있는마을 / 200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린이를 위한 동화 중에선 어린 나이에 읽으면서 웃을 수 있는 책이 있고, 나이가 든후 그 의미를 되새기며 미소짓게 되는 책이 있다. 전자의 경우가 독자의 연령과 수준을 고려하여 쓰여져 쉽고 아기자기한 재미를 주는 것이라면, 후자는 동화이면서도 삶의 철학이 녹아 오래도록 교훈을 줄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어린 왕자’는 후자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다. 어른에게도 삶의 의미를 되새기며 발상의 전환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어린왕자가 지금까지 명작으로 남아 우리에게 사랑 받는 이유일 것이다. 덕분에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그림은 우리에게도 익숙하여 일상적 사물을 한번쯤 다른 각도로 보는 계기가 되고, 어린 왕자가 살고 있을 소행성 B612는 한번쯤 하늘의 별을 쳐다보게 한다. 이렇게 어린 왕자는 여러 가지의 의미로 인상을 남기지만 그중 백미는 ‘길들이다’라는 개념일 것이다. ‘길들이기’를 행함으로서 대상에 대한 애정과 책임이 생기는 것이다. 이는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애정을 다룬 다는 것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어린 왕자가 여우에게 이것을 배움으로서 자신의 장미가 가지는 의미를 깨닫는 것은 곧 우리가 주변 사물(혹은 주변 사람)에 대한 의미를 깨닫는 것을 나타낸다. 그럼 어린 왕자에게 장미꽃이, 여우에게 어린 왕자가 가지는 의미는 어떤 것이었을까?

어린 왕자에 나오는 사랑은 크게 세가지가 있다. 장미꽃의 어린 왕자에 대한 사랑, 어린 왕자의 장미꽃에 대한 사랑, 여우의 어린 왕자에 대한 사랑이 그것이다. 이중 장미꽃은 어린 왕자에게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장미꽃은 어느날 소행성 B612로 떨어진 씨에서 태어난 것으로 자존심과 허영심을 가지고 있었다. 바람이 차다고 불평하고,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하는데 결국 이것들은 어린 왕자의 관심을 끌기 위한 행동일 뿐이었다. 하지만 어린 왕자는 (당시엔)이러한 행동들을 진지하게만 받아들여 이해하지 못하고 여행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1) 한편, 어린 왕자가 자신을 두고 여행을 떠날 것이라는 것을 안 순간의 장미꽃의 발언은 그동안 전하지 못한 진심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가득하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어린 왕자에게 사랑했음을 실토하는 장면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 어린 왕자에 대한 원망도 담겨있다. 이러한 장미꽃의 사랑은 플라토닉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요구하는 태도에서 자기중심적인 면을 보이며, 자신만을 바라보길 바라는 것과 떠나는 어린 왕자를 원망함으로서 소유욕을 드러내는 것이다. 어린 왕자의 별에 장미의 향기를 선사하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지만 일종의 (자신으로의)동화를 꾀하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별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일체화되길 바라는 형태로 보여지는 것이다. 육체적 사랑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전제 되지 않았지만 이 책에 나타나는 장미꽃의 사랑은 플라토닉 사랑의 성격과 같다 하겠다.

어린 왕자의 사랑은 장미꽃의 사랑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일단 스스로도 그 감정을 늦게서야 깨닫는다. 오천송이의 장미꽃이 가득한 장미꽃밭을 봤을때 울음을 터뜨리는 것은 자신의 장미꽃이 보잘것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었다. 그건 자신이 특별하게 여기는 존재가 의미없는 존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부정하고 싶은 것이다.2) 하지만 곧 여우를 만나게 되고 여우에게 ‘길들인다’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어린왕자와 여우가 서로에게 길들여지면서 어린 왕자는 자신이 장미꽃에게 길들여졌음을 깨닫게 된다. 어린 왕자가 장미꽃밭에 가서 자신의 장미꽃이 특별함을 말하는 대목에서 자신이 길들여진 장미꽃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음을 내비침으로서 그 사랑을 구체화한다. 이러한 어린 왕자의 사랑은 아가페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장미꽃에 대해선 그 자체만으로 사랑하는 타인 본위의 사랑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자신이 장미꽃을 위해 물을 준 일, 벌레를 잡아준 일, 불평과 하품을 들어준 일에 모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 사랑을 더 크게 만든다. 그 후에 여우로 인해 어린 왕자는 장미꽃을 위해 소비한 시간이 장미꽃을 그토록 소중하게 했음을 깨우치고 길들인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을 배움으로서 이 사랑은 완성된다. 장미꽃에게 맡은 책임을 다하기 위해 무거운 육신을 버리고 힘든 여행을 떠나는 것은 어린 왕자의 사랑의 위대함을 드러낸다.

이러한 어린 왕자의 사랑의 완성은 그 자신의 노력도 있지만 곁에서 길들인는 것을 가르쳐주고 그 책임을 일깨워준 여우의 역할이 크다.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길들여지길 원했고, 길들여졌다. 길들이는 과정에서 기다려지는 시간에서조차 행복을 얻는 여우의 모습은 아름답다. 또한 어린 왕자에게 그의 장미꽃에 대한 책임을 말하면서 정작 길들여진 자신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는다. 어린 왕자와 서로 길들여졌음에도 불구하고 길들여진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어린 왕자가 장미꽃을 사랑하는 것을 알고 떠날 수 있게 등을 떠밀어주는 모습은 자신의 사랑을 희생함으로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 또한 아가페 사랑으로 볼 수 있다. 어린 왕자가 떠나는 것에 슬픔을 느끼고 가슴아파하면서도 정작 잡지 않는 것은 어린 왕자가 갈길을 알기 때문이다. 헤어질 것을 알면서도 길들여지길 바라고 길들여지고도 더 이상 욕심내지 않는 것은 사랑 자체에 의미를 둔 행위이다. 어린 왕자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사랑하는 것은 숭고하게 여겨진다. 절대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이 작품은 전반적으로 주변 사물, 인간에 대한 애정을 담고 있다. 에로스 사랑이 작품 속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작가가 새로운 생성의 문제보단 현재 존재하는 본질에 충실하고, 그 자체를 사랑하고자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플라토닉 사랑이 자기중심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자신에 대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랑을 추구하는 것으로, 아가페 사랑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것(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저자가 말하려 했던 이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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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수명이 짧은 나라
야마모토 토시하루 지음, 문종현 옮김 / 달과소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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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국경없는 의사회라는 단어는 우리가 익히 들어온 국제기구이기 때문에 익숙하다. 그러나 그 실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고, 이 책을 읽기 전까진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고, 한번쯤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스쳐지나가듯 해볼 따름이었다. 그것도 단순히 국제적인 자원 봉사활동에 대한 자기만족적인 발상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 책은 국경없는 의사회가 막연한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아프리카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하는 단체로 가지고 있는 고충과 그들의 행동 등에 대해 일상적 묘사를 함으로써 시에라리온, 나아가 아프리카의 현실을 보여주고 국경없는 의사회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저자는 일본인으로 MSF일본을 통해 ‘시에라리온’에 파견된 것이었다. ‘시에라리온’이라는 나라는 책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세상에서 가장 수명이 짧은 나라’였다. 세계 평균 수명이 65세인데 비해 시에라리온의 평균 수명은 25~35로 세계 평균 수명의 절반에 불과하고 세계에서 제일 짧다. 이렇게 항상 UN과 WHO(세계보건기구)의 주목을 받으며, 의심할 여지없이 세계 최악의 의료 사정에 놓여 있는 국가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라는 저자의 질문은 나로 하여금 말문이 막히게 하였다. 아프리카라고 해도 뭉뚱그려서 빈민의 이미지만을 가지고 있는 나로선 시에라리온은 처음 듣는 나라였다. 아니, 그 이전에 나라 이름인지도 모르는 곳이었다. 하물며 그곳의 사정과 지리적 위치를 알리 만무했다. ‘무지(無智)’의 상태,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이나 서구에서는 시에라리온의 열악한 의료 환경으로 인해 잘 알려져 있으며 각종 의료 봉사활동이나 구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곳이었다. 우리들의 무관심이 무지를 가져온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자원․자본의 사회 환원이나 봉사․복지의 개념이 약하기 때문인지 다른 나라에 비해 이러한 활동이 상당히 미미하다. 아는 사람도 별로 없으며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이들의 수도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자원의 사회 환원과 제 3세계에 대한 국제적인 지원은 필수적이다. 가지기만 해서는 천박한 자본주의 논리에 곧 희생당할 뿐이며, 다른 나라의 인정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단순히 돈이나 자원이 많다고 해서 모두 선진국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그에 걸맞는 합당한 행위가 요구된다. 자신보다 형편이 여의치 않은 이들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하고, 함께 공존하는 방향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나라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사회 전반에 걸친 국제사회에 대한 지원이나 원조에 대한 개념이 희박한 상황에서 지구촌 곳곳의 사정을 이해하고 함께 나아갈 것을 추구한 다는 것은 그다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은 우리가 한번쯤 되돌아보고, 나 자신, 나아가 우리 국가 그리고 다양한 나라가 지향해야 할 길을 한가지 제시해준다. (물론 이것이 유일한 길은 아니지만 지향할만한 가치를 지닌 길 중에 하나라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시에라리온에 파견된 저자의 생활을 보면 처절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아침의 시작을 새벽에 느껴지는 배속의 통증으로 시작하는 모습과 즉시 화장실로 달려가는 장면을 읽으면 정말  봉사활동에 대한 동경은 혐오의 그늘에 놓이게 된다. 화장실에 달려가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식의 화장실이 아닌 단순히 땅에 구덩이를 파놓고 주변이 발과 같은 것으로 쳐져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곳을 우리가 보는 것의 5배쯤 되는 바퀴벌레가 기어 다닌다면 정말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게다가 병원에 있는 화장실도 가봤더니 벽이 갈색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알고 봤더니 그것이 전부 갈색 나방이어서 파닥거리는(게다가 온갖 기생충과 설사병을 옮겨줄 수 있는) 나방들에게 휩싸여 뛰쳐나오게 되는 것은 끔찍한 경험이라는 것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한 것들을 전부 이해하고 감수하면서 병자들을 치료하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이 책을 살펴보면 저자의 행위가 대단하다 싶을만큼 숭고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웃음이 새나올 만큼 어의없어 보이는 것들도 있다. 그중 하나가 MSF가 무장한 집단에게 습격당하면 가지고 있는 돈과 컴퓨터, 자동차, 통신 장치 등을 모두 내주고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하는 것이다. 위급한 상황을 위해 고용된 자들도 ‘장식용’에 지나지 않는다. 도둑이나 강도들에게 야간에도 불을 환하게 밝히고 많은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라는 모습을 보여 털기 쉽지 않은 곳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근처의 강도발생률을 주의 깊게 살피고 강도 사건이 증가하면 다른 대책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를 중지시키고 재빨리 피신한다. 그리고 실제로 강도가 들어와 권총을 들이밀 경우 야간 순찰원들은 목숨을 걸고 그들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금고까지 강도를 안내해도 좋다고 되어있다. ‘뭐가 이래?!’ 싶을 만큼 당혹스러운 측면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들은 ‘무기는 무기를 부른다’라는 신조아래 무장을 하지 않고 최대한 안전한 방법을 찾는 것이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또 한편 인상 깊었던 것은 그곳에서 일하는 그들 또한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흔히 환상을 갖는 것이 그런 곳에서 자원봉사 하는 분들은 정말로 봉사정신이 투철하고 특별한 사람들이 할 것이라 생각되는 면이 없잖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성격적으로도 착하거나 희생정신이 있는 사람들이라 예상되기 때문에 서로 의견 대립으로 싸우고, 그로인해 누군가가 떠나버리는 것들이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환상과는 다르게 같은 스텝들끼리도 매번 싸우고, 문제를 일으켜서 쫓겨나게 되는 것을 보니 이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애문제로 인해 규칙을 어기는 사람이며, 현지에서 떠나버리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기 까지 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나 같은 사람도 충분히 지원해서 할 수 있을거라 생각된다. 이런 것과 맞물려 한가지 더 용기를 갖게 되는 것은 저자가 나열한 각종 참가 이유이다. 내가 예상했던 숭고한 희생정신이나 봉사정신만이 아니라 그 외 다른 이유가 무수히 많았던 것이다. 오히려 불순하다 싶은 이유도 있었다. 그 예를 들자면 여행다니는 것을 좋아하는데 여비는 참가단체에서 제공한다는 이유, 사회에서의 실패로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연애를 아주 좋아하며 외국에서 애인을 찾아 성생활을 만끽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이유, 영어 혹은 프랑스어 회화연수, 언론에서 보인 MSF가 멋져보여서, 훗날 국제기구 취직을 위해 이력을 갖고자 등등의 이유들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들이었다. 이러한 이유로도 참가해서 일하는데 나름대로 기여한다면 멋지지 않은가?

나로선 꽤나 솔깃한 이야기들이었다. 초반에 저자가 서술한 매우 힘들 것 같은 실생활은 둘째치고라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양한 각국의 사람을 접하고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느낌은 자존감을 채워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저자가 의도한대로 소외된 나라의 실태를 알 수 있었고, 조금이나마 돕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이 속에 서술된 시에라리온의 현실과 그곳에서 일하는 자들의 어려움, 그리고 국제기구의 역할은 평소의 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겪은 그대로를 보여줌으로써 어느 것보다 생생한 현실을 가르쳐 준 것이다. 저자의 생활을 보다보니 경악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나 또한 이런 자원봉사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용기도 생기고, 또한 관심도 생기게 되었다. 그것도 전과 같은 막연한 생각이 아니라 좀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구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 책으로 인해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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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해방
피터 싱어 지음, 김성한 옮김 / 인간사랑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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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생활 속에서 ‘개팔자가 상팔자다’라는 말을 쉽게 듣는다. 이 속담은 일이 힘들고 고될 때 놀고 먹는 개와 비교하며 자신의 삶을 자조하는 말이다. 그러나 최근엔 주인에게 사랑 받으며 예쁜 옷을 입고, 제때 사료를 먹은 개를 보며 비꼬는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도 종종 눈에 띈다. 주인 잘 만나 호강한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이 세상에 못먹는 사람도 많은데 개가 더 잘먹는다’라는 식의 표현도 우리에겐 익숙하다. 지구 한쪽에선 굶어죽는 사람도 있는데 다른 한쪽에선 개가 사람보다 더 잘 챙겨먹으니 , 차라리 그 돈으로 굶어죽는 사람이나 구제하지라는 비판도 담겼을 것이다. 이렇게 사람보다 더 나은 삶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는 개에 대한 비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한번 더 생각해보면 이러한 호강의 기준은 무엇이고, 왜 개는 사람보다 호강하면 안되는지 의구심이 들기 마련이다. 보통 이러한 생활을 누리는 개들은 사람과 같이 생활한다. 그리고 사람과 같이 생활하기 위해 거세 수술이나 성대 제거 수술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주인의 편의에 의해 수술을 받고 장애를 지니게 된 개에게도 호강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까? 그들의 스트레스는 고려되지 않은 삶이고 여의치 않으면 버려지기까지 하는 그들의 처지가 사람보다 낫다고 단언하긴 힘들 것이다. 한편 ‘개가 사람보다 더 잘 먹는다’라는 표현은 얼핏 들어선 인권운동을 주장하는 것 같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인권을 위해 다른 것을 희생해도 된다는 논리도 될 수있다. 인간중심주의-일종의 종차별적인 발상인 것이다. 사람이 못먹는 상황에서 개가 잘 먹는 것이 아니라 호화롭고 낭비적인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이 먼저 문제시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분명 사치스러운 식사를 하는 사람이 이러한 식사를 하는 개보다 많다) 우리는 다른 종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편견의 잣대를 들이대도 그들의 삶을 시샘하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사람들의 인식과 그 실태를 보여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행해지고 있는 동물실험에서 과학적 탐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많다. 예를 들어 하로우는 갓 태어난 원숭이를 철창 속에 가두어 고립시킨다든가 새끼 원숭이에게 인공 괴물 어미를 주어 원숭이를 학대하였다. 나중엔 ‘강간고문’이라 부르는 기술을 통해 어미 원숭이를 임신시켜 이러한 어미 원숭이가 새끼 원숭이에게 보이는 포악한 행동을 관찰하였다. 그러나 원숭이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나온 결과는 이미 알고있는 사항들이었다. 오랜 시간 고립됨으로써 사회적 반응을 두려워한다든가 상처 입은 새끼가 어미에게 매달리는 것은 충분히 예상된 결론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연구는 자행되었으며, 다른 변수들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끝을 맺었다. 이외에도 개를 매질하고 전기충격을 가해 무기력증을 학습시킨다든가 쥐들이 경고표지가 있는 충격을 받길 원한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실험은 계속 되었다. 상품과 관련된 동물실험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제초제로 원숭이를 중독시켜 고통을 준다든가 토끼를 머리만 내밀고 고정되게 하여 눈에 실험재료를 투입하는 실험을 한다. 그러나 동물실험의 결과 인간과 동물뿐만이 아니라 동물 중 각각의 종별로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 점에서도 이 실험은 무의미하며, 이러한 동물 실험이 인간에게 어떤 유용성을 주는지 명확하게 밝혀진 바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실험들이 가지는 모순은 분명하다. 동물이 사람과 다르다면 그들을 대상으로 실험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동물이 사람과 같다면 학대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동물 실험이 계속되어야 할 근거가 없다.

또 한가지 동물 학대의 예로는 가축들의 생활이다. 닭의 경우 일반적으로 대형 생산업자를 통해 사육된다. 태어난 지 하루 된 병아리들이 층층이 쌓아놓은 우리 안에 갇혀 체중을 빨리 불리기 위해 24시간 밝은 조명 속에 노출되는 것이다. 닭이 성장한 후 우리는 비좁을 수밖에 없다. 좁은 공간에서 닭은 공격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이로 인해 닭들이 서로 싸워 농장 경영인에게 손해가 되자 이들은 불빛을 흐리게 하여 공격성을 완화시키며 한편으로는  ‘부리자르기’를 감행한다. 계란 생산업자들도 닭에게 고통을 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좁은 우리 안에 수만 마리의 닭을 넣어놓았는데 이러한 닭장은 계란의 손쉬운 수거를 위해 20도 가량의 경사가 있어 서있기도 쉽지 않다. 또한 바닥은 배설물을 자주 치우지 않아도 되도록 철망으로 하는데 이러한 철망은 닭들의 다리에 상처를 입히고, 발톱은 계속 길어져 철사에 엉켜 감길 수 있다. 돼지나 소도 이러한 생활과 별반 차이가 없다. 닭이 부리를 잘리듯이 돼지도 좁은 공간에서 서로의 꼬리를 물고 체중 감소를 가져오기 때문에 그들의 꼬리가 잘린다. 송아지의 경우도 고기가 질겨지지 않게 하기 위해 감금 장치에 가두고 움직이지 못하게 목에 사슬을 매어둔다. 송아지들은 성장 촉진제가 들어간 액체 음식을 섭취하고 체중을 불려간다. 많이 먹이기 위해 물을 주지 않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여 최대한 체중을 늘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축들은 불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후로 차츰 이러한 동물들의 생활을 개선시키기 위한 꼬리 자르기, 거세 금지, 밧데리 새장 단계적 제거 등의 방침들이 수립되어 왔으나 여전히 가축들은 착취당하고 있다.

동물에게 계속되는 착취를 줄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것으로는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이다.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다른 존재의 목숨을 앗아갈 준비가 되어있다면 음식이 되는 존재인 동물들을 우린 이미 이용할 무엇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대규모로 식용 동물을 사육하면서 동물을 학대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육식을 하는 한 사육업자들은 그들의 생산방식을 고수하여 수입을 얻을 수 있고, 결국 우리는 공장식 영농의 번영에 일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방식이 죽은 소를 되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불매운동은 과거가 아닌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다. 죽은 소를 되살릴 수는 없어도 죽음을 맞이할 소를 살릴 수는 있는 것이다. 수요가 적다면 가격은 낮아질 수밖에 없으며, 이는 사육되고 도축될 동물들의 수를 줄일 수 있다. 또한 사육되는 동물의 수가 줄어들면 그만큼 곡식의 소비가 줄어 세계 식량 사정에도 기여할 수 있다. 미국의 가축 수를 절반으로 줄인다해도 비 사회주의 저개발 국가의 칼로리 부족액을 거의 4번 메우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라 하는 말은 동물로 인한 곡물의 소비가 막대함을 이르는 것이다. 곡류의 낭비 외에도 엄청난 양의 화석 연료가 사용되는데 이는 곡식 재배에 비하면 몇 십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 수준이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볼 때 별다른 이익을 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육류 생산에 투입되는 물의 수요로 인해 지하수가 고갈되고 있다. 동시에 가축의 배설물이 땅이 안전하게 흡수할 수 있는 양을 초과함으로써 남는 배설물들이 물로 흘러 오염시키곤 한다. 이외에도 목초지로 사용하기 위한 산림 파괴 등의 행위는 동물을 사육하는 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들이고, 우리가 육식을 하는 한 해결되지 않는 과제일 것이다.

우리가 행하는 동물에 대한 잔혹한 행동들은 우리에게 내재한 종차별적인 의식에 기초한 것이다. 살아서 움직이는 것은 모두 인간의 양식이 되리라는 신의 축복이 나타난 성서의 경우 종차별주의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 뒤에도 이성적이지 못한 피조물에게 자애로울 필요가 없다는 아퀴나스나 영원불멸의 영혼을 갖지 않은 동물들이 의식마저 갖고 있지 않다는 논리의 데카르트는 물론이고, 심지어 우리가 자연의 일부이고 동물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했던 다윈마저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여 육식하기를 택함으로써 동물 사용을 정당화하려는 이데올로기적 특성을 보여준다. 동물들의 이익은 인간의 이익과 충돌하지 않을 때에만 고려되는 것이다. 동물에 대한 차별적 인식은 우리에게 뿌리깊게 남아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우리가 쓰는 ‘야수 같은’, ‘짐승 같은’ 등의 표현이 ‘인간적’이라는 표현과 대비되어 야만적이고 잔인하다는 의미로 쓰이곤 한다. 그러나 사자나 늑대가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 사냥을 하고 다른 동물을 죽이는 ‘야수 같은’ 행위와 단순한 오락이나 미적 충족을 위해,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동물들을 학대하고 죽이는 ‘인간적’인 행위의 차이는 무엇인가? ‘인간적’이라는 표현이 주는 인도적인 어감은 그다지 사실에 가깝지 않은 것이다. 이는 동물을 상대로 실험을 하고, 그들이 고통받는 사육방식을 고수하는 인간들이 “동물은 인간이 아니야”라는 말로 자신들을 행위를 설명하면서도 정작 육식에 대해선 고기를 먹지 않아도 사는 동물들을 예로 들어 자신들의 식습관을 정당화하는 논거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우리는 엄연히 도덕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이고 동물은 옳고 그름을 고찰할 능력이 없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 법적 처벌이 주어지지 않듯이 우리는 도덕적 판단 능력이 없는 동물의 행태를 따를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성으로 판단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종차별적인 발상에서 벗어나 진정한 동물해방을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하고 그 시작으로 우리는 채식주의자가 되야 하는 것이다.

저자의 논지는 동물도 인간과 같이 고통을 느끼고 하나의 생명체로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간이 모든 동물을 지배할 수 있을 만큼 우월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인간과 다른 하나의 종으로 보아 그들을 학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논리에는 공리주의적 인식이 담겨있다. 동물도 인간처럼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그들에게 많은 고통을 주는 이러한 행위는 비윤리적이며, 삼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장식 농장에서 동물들은 움직일 수 있는 권리, 잠을 잘 수 있는 권리, 원하는 것을 먹을 권리 등을 박탈당하여 극도의 스트레스와 고통에 시달린다. 이것을 이익 동등 고려 원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는데 동물들을 이성적 사고나 대화의 능력으로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삶을 존중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고통을 기준으로 하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다른 생명체에 대해는 인도주의적 행위를 할 필요가 없음을 말하는 것과 같다. 신경체계가 복잡하지 않거나 사고로 신경체계를 잃은 생물을 옹호하는 논리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은 이익 고려 대상에서 배제되기 쉬운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공리주의가 가지는 문제는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는 소수의 희생이 정당화 될 수 있다는데 있다. 최대한 많은 이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이익에 반하는 존재의 존엄성은 무시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이익을 가지는 존재의 기준이 매우 모호하다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고통의 범위는 어느 정도이며, 이익을 가져 우리가 학대할 수 없는 종은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서 저자의 논리는 불완전하다. 또한 인간이 아무리 동물과 신경생리학적으로 유사하다고 할지라도 그로 인해 고통을 동등하게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발달한 이성체계는 과거나, 현재뿐만이 아니라 미래를 예상할 수도 있고, 좀더 세부적인 요소들로 인해 고통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물과 비슷하다고 여기고 동물에게 인간과 같은 입장을 부여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채식주의에 대해서도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분명 세계가 식량부족현상을 겪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굳이 가축에 소요되는 식량만이 아니더라도 분명 한쪽에서는 생산물이 남아돌아 바다에 던지기도 하고, 또 한쪽에서는 굶어죽고 있다. 육류 소비를 줄여 가축이 먹는 곡류의 양이 감소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꼭 식량부족국가에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수치에 따른 비교일 뿐 현실적으로 그렇게 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꼭 채식을 해야만 가축들을 구제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인간들이 계속 육식을 해오면서도 가축들의 생활은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 우리가 육식을 한다고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동물들의 사육에 더 나은 환경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요즘 시장에 가더라도 밧데리 새장이 아닌 좀더 넓은 장소에서 낳은 계란 같은 것도 판매되고 있다. 좀더 비싼 가격이긴 하지만 가축들의 삶이 나아지기 위해서 이런 것들을 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 둘 동물의 사육 방법에 신경쓰고, 그들의 안정적인 생활을 고려하는 선택을 하는 습관을 기른다면 굳이 채식만을 고집하지 않아도 이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동물들은 오랜 시간 인간에게 지배당해왔다. 분명 인간의 학대나 착취는 불합리한 것이었고, 시정 되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은 동물들의 실태를 일깨우고,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공리주의 적인 주장은 이익을 갖는 대상이 불분명하고,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가 희생할 수 있다는 논리에서 한계를 지니고, 채식주의를 해야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시행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저자의 주장이 구체적이었음에도 실생활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을 자라온 삶을 바꾸라고 하기보다는 사고방식의 전환을 꾀하고 거부감 없이 시작할 수 있도록 쉬운 방법부터 제시했어야 한다. 하지만 분명 [동물해방]이 요즘에도 설득력을 지니고 우리에게 많은 충격을 준다는 것은 당시에 이것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 얼마나 사회에 파문을 일으켰을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미래를 생각하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 동물에게도 인간과 같은 권리를 확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선구자적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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