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해방
피터 싱어 지음, 김성한 옮김 / 인간사랑 / 199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의 생활 속에서 ‘개팔자가 상팔자다’라는 말을 쉽게 듣는다. 이 속담은 일이 힘들고 고될 때 놀고 먹는 개와 비교하며 자신의 삶을 자조하는 말이다. 그러나 최근엔 주인에게 사랑 받으며 예쁜 옷을 입고, 제때 사료를 먹은 개를 보며 비꼬는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도 종종 눈에 띈다. 주인 잘 만나 호강한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이 세상에 못먹는 사람도 많은데 개가 더 잘먹는다’라는 식의 표현도 우리에겐 익숙하다. 지구 한쪽에선 굶어죽는 사람도 있는데 다른 한쪽에선 개가 사람보다 더 잘 챙겨먹으니 , 차라리 그 돈으로 굶어죽는 사람이나 구제하지라는 비판도 담겼을 것이다. 이렇게 사람보다 더 나은 삶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는 개에 대한 비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한번 더 생각해보면 이러한 호강의 기준은 무엇이고, 왜 개는 사람보다 호강하면 안되는지 의구심이 들기 마련이다. 보통 이러한 생활을 누리는 개들은 사람과 같이 생활한다. 그리고 사람과 같이 생활하기 위해 거세 수술이나 성대 제거 수술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주인의 편의에 의해 수술을 받고 장애를 지니게 된 개에게도 호강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까? 그들의 스트레스는 고려되지 않은 삶이고 여의치 않으면 버려지기까지 하는 그들의 처지가 사람보다 낫다고 단언하긴 힘들 것이다. 한편 ‘개가 사람보다 더 잘 먹는다’라는 표현은 얼핏 들어선 인권운동을 주장하는 것 같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인권을 위해 다른 것을 희생해도 된다는 논리도 될 수있다. 인간중심주의-일종의 종차별적인 발상인 것이다. 사람이 못먹는 상황에서 개가 잘 먹는 것이 아니라 호화롭고 낭비적인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이 먼저 문제시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분명 사치스러운 식사를 하는 사람이 이러한 식사를 하는 개보다 많다) 우리는 다른 종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편견의 잣대를 들이대도 그들의 삶을 시샘하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사람들의 인식과 그 실태를 보여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행해지고 있는 동물실험에서 과학적 탐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많다. 예를 들어 하로우는 갓 태어난 원숭이를 철창 속에 가두어 고립시킨다든가 새끼 원숭이에게 인공 괴물 어미를 주어 원숭이를 학대하였다. 나중엔 ‘강간고문’이라 부르는 기술을 통해 어미 원숭이를 임신시켜 이러한 어미 원숭이가 새끼 원숭이에게 보이는 포악한 행동을 관찰하였다. 그러나 원숭이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나온 결과는 이미 알고있는 사항들이었다. 오랜 시간 고립됨으로써 사회적 반응을 두려워한다든가 상처 입은 새끼가 어미에게 매달리는 것은 충분히 예상된 결론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연구는 자행되었으며, 다른 변수들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끝을 맺었다. 이외에도 개를 매질하고 전기충격을 가해 무기력증을 학습시킨다든가 쥐들이 경고표지가 있는 충격을 받길 원한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실험은 계속 되었다. 상품과 관련된 동물실험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제초제로 원숭이를 중독시켜 고통을 준다든가 토끼를 머리만 내밀고 고정되게 하여 눈에 실험재료를 투입하는 실험을 한다. 그러나 동물실험의 결과 인간과 동물뿐만이 아니라 동물 중 각각의 종별로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 점에서도 이 실험은 무의미하며, 이러한 동물 실험이 인간에게 어떤 유용성을 주는지 명확하게 밝혀진 바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실험들이 가지는 모순은 분명하다. 동물이 사람과 다르다면 그들을 대상으로 실험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동물이 사람과 같다면 학대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동물 실험이 계속되어야 할 근거가 없다.

또 한가지 동물 학대의 예로는 가축들의 생활이다. 닭의 경우 일반적으로 대형 생산업자를 통해 사육된다. 태어난 지 하루 된 병아리들이 층층이 쌓아놓은 우리 안에 갇혀 체중을 빨리 불리기 위해 24시간 밝은 조명 속에 노출되는 것이다. 닭이 성장한 후 우리는 비좁을 수밖에 없다. 좁은 공간에서 닭은 공격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이로 인해 닭들이 서로 싸워 농장 경영인에게 손해가 되자 이들은 불빛을 흐리게 하여 공격성을 완화시키며 한편으로는  ‘부리자르기’를 감행한다. 계란 생산업자들도 닭에게 고통을 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좁은 우리 안에 수만 마리의 닭을 넣어놓았는데 이러한 닭장은 계란의 손쉬운 수거를 위해 20도 가량의 경사가 있어 서있기도 쉽지 않다. 또한 바닥은 배설물을 자주 치우지 않아도 되도록 철망으로 하는데 이러한 철망은 닭들의 다리에 상처를 입히고, 발톱은 계속 길어져 철사에 엉켜 감길 수 있다. 돼지나 소도 이러한 생활과 별반 차이가 없다. 닭이 부리를 잘리듯이 돼지도 좁은 공간에서 서로의 꼬리를 물고 체중 감소를 가져오기 때문에 그들의 꼬리가 잘린다. 송아지의 경우도 고기가 질겨지지 않게 하기 위해 감금 장치에 가두고 움직이지 못하게 목에 사슬을 매어둔다. 송아지들은 성장 촉진제가 들어간 액체 음식을 섭취하고 체중을 불려간다. 많이 먹이기 위해 물을 주지 않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여 최대한 체중을 늘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축들은 불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후로 차츰 이러한 동물들의 생활을 개선시키기 위한 꼬리 자르기, 거세 금지, 밧데리 새장 단계적 제거 등의 방침들이 수립되어 왔으나 여전히 가축들은 착취당하고 있다.

동물에게 계속되는 착취를 줄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것으로는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이다.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다른 존재의 목숨을 앗아갈 준비가 되어있다면 음식이 되는 존재인 동물들을 우린 이미 이용할 무엇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대규모로 식용 동물을 사육하면서 동물을 학대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육식을 하는 한 사육업자들은 그들의 생산방식을 고수하여 수입을 얻을 수 있고, 결국 우리는 공장식 영농의 번영에 일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방식이 죽은 소를 되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불매운동은 과거가 아닌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다. 죽은 소를 되살릴 수는 없어도 죽음을 맞이할 소를 살릴 수는 있는 것이다. 수요가 적다면 가격은 낮아질 수밖에 없으며, 이는 사육되고 도축될 동물들의 수를 줄일 수 있다. 또한 사육되는 동물의 수가 줄어들면 그만큼 곡식의 소비가 줄어 세계 식량 사정에도 기여할 수 있다. 미국의 가축 수를 절반으로 줄인다해도 비 사회주의 저개발 국가의 칼로리 부족액을 거의 4번 메우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라 하는 말은 동물로 인한 곡물의 소비가 막대함을 이르는 것이다. 곡류의 낭비 외에도 엄청난 양의 화석 연료가 사용되는데 이는 곡식 재배에 비하면 몇 십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 수준이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볼 때 별다른 이익을 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육류 생산에 투입되는 물의 수요로 인해 지하수가 고갈되고 있다. 동시에 가축의 배설물이 땅이 안전하게 흡수할 수 있는 양을 초과함으로써 남는 배설물들이 물로 흘러 오염시키곤 한다. 이외에도 목초지로 사용하기 위한 산림 파괴 등의 행위는 동물을 사육하는 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들이고, 우리가 육식을 하는 한 해결되지 않는 과제일 것이다.

우리가 행하는 동물에 대한 잔혹한 행동들은 우리에게 내재한 종차별적인 의식에 기초한 것이다. 살아서 움직이는 것은 모두 인간의 양식이 되리라는 신의 축복이 나타난 성서의 경우 종차별주의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 뒤에도 이성적이지 못한 피조물에게 자애로울 필요가 없다는 아퀴나스나 영원불멸의 영혼을 갖지 않은 동물들이 의식마저 갖고 있지 않다는 논리의 데카르트는 물론이고, 심지어 우리가 자연의 일부이고 동물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했던 다윈마저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여 육식하기를 택함으로써 동물 사용을 정당화하려는 이데올로기적 특성을 보여준다. 동물들의 이익은 인간의 이익과 충돌하지 않을 때에만 고려되는 것이다. 동물에 대한 차별적 인식은 우리에게 뿌리깊게 남아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우리가 쓰는 ‘야수 같은’, ‘짐승 같은’ 등의 표현이 ‘인간적’이라는 표현과 대비되어 야만적이고 잔인하다는 의미로 쓰이곤 한다. 그러나 사자나 늑대가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 사냥을 하고 다른 동물을 죽이는 ‘야수 같은’ 행위와 단순한 오락이나 미적 충족을 위해,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동물들을 학대하고 죽이는 ‘인간적’인 행위의 차이는 무엇인가? ‘인간적’이라는 표현이 주는 인도적인 어감은 그다지 사실에 가깝지 않은 것이다. 이는 동물을 상대로 실험을 하고, 그들이 고통받는 사육방식을 고수하는 인간들이 “동물은 인간이 아니야”라는 말로 자신들을 행위를 설명하면서도 정작 육식에 대해선 고기를 먹지 않아도 사는 동물들을 예로 들어 자신들의 식습관을 정당화하는 논거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우리는 엄연히 도덕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이고 동물은 옳고 그름을 고찰할 능력이 없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 법적 처벌이 주어지지 않듯이 우리는 도덕적 판단 능력이 없는 동물의 행태를 따를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성으로 판단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종차별적인 발상에서 벗어나 진정한 동물해방을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하고 그 시작으로 우리는 채식주의자가 되야 하는 것이다.

저자의 논지는 동물도 인간과 같이 고통을 느끼고 하나의 생명체로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간이 모든 동물을 지배할 수 있을 만큼 우월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인간과 다른 하나의 종으로 보아 그들을 학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논리에는 공리주의적 인식이 담겨있다. 동물도 인간처럼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그들에게 많은 고통을 주는 이러한 행위는 비윤리적이며, 삼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장식 농장에서 동물들은 움직일 수 있는 권리, 잠을 잘 수 있는 권리, 원하는 것을 먹을 권리 등을 박탈당하여 극도의 스트레스와 고통에 시달린다. 이것을 이익 동등 고려 원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는데 동물들을 이성적 사고나 대화의 능력으로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삶을 존중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고통을 기준으로 하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다른 생명체에 대해는 인도주의적 행위를 할 필요가 없음을 말하는 것과 같다. 신경체계가 복잡하지 않거나 사고로 신경체계를 잃은 생물을 옹호하는 논리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은 이익 고려 대상에서 배제되기 쉬운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공리주의가 가지는 문제는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는 소수의 희생이 정당화 될 수 있다는데 있다. 최대한 많은 이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이익에 반하는 존재의 존엄성은 무시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이익을 가지는 존재의 기준이 매우 모호하다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고통의 범위는 어느 정도이며, 이익을 가져 우리가 학대할 수 없는 종은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서 저자의 논리는 불완전하다. 또한 인간이 아무리 동물과 신경생리학적으로 유사하다고 할지라도 그로 인해 고통을 동등하게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발달한 이성체계는 과거나, 현재뿐만이 아니라 미래를 예상할 수도 있고, 좀더 세부적인 요소들로 인해 고통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물과 비슷하다고 여기고 동물에게 인간과 같은 입장을 부여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채식주의에 대해서도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분명 세계가 식량부족현상을 겪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굳이 가축에 소요되는 식량만이 아니더라도 분명 한쪽에서는 생산물이 남아돌아 바다에 던지기도 하고, 또 한쪽에서는 굶어죽고 있다. 육류 소비를 줄여 가축이 먹는 곡류의 양이 감소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꼭 식량부족국가에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수치에 따른 비교일 뿐 현실적으로 그렇게 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꼭 채식을 해야만 가축들을 구제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인간들이 계속 육식을 해오면서도 가축들의 생활은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 우리가 육식을 한다고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동물들의 사육에 더 나은 환경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요즘 시장에 가더라도 밧데리 새장이 아닌 좀더 넓은 장소에서 낳은 계란 같은 것도 판매되고 있다. 좀더 비싼 가격이긴 하지만 가축들의 삶이 나아지기 위해서 이런 것들을 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 둘 동물의 사육 방법에 신경쓰고, 그들의 안정적인 생활을 고려하는 선택을 하는 습관을 기른다면 굳이 채식만을 고집하지 않아도 이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동물들은 오랜 시간 인간에게 지배당해왔다. 분명 인간의 학대나 착취는 불합리한 것이었고, 시정 되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은 동물들의 실태를 일깨우고,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공리주의 적인 주장은 이익을 갖는 대상이 불분명하고,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가 희생할 수 있다는 논리에서 한계를 지니고, 채식주의를 해야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시행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저자의 주장이 구체적이었음에도 실생활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을 자라온 삶을 바꾸라고 하기보다는 사고방식의 전환을 꾀하고 거부감 없이 시작할 수 있도록 쉬운 방법부터 제시했어야 한다. 하지만 분명 [동물해방]이 요즘에도 설득력을 지니고 우리에게 많은 충격을 준다는 것은 당시에 이것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 얼마나 사회에 파문을 일으켰을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미래를 생각하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 동물에게도 인간과 같은 권리를 확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선구자적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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